[김태은의 폴리티션!] '살라자르의 덫'과 박근혜 대통령

김태은 기자
2015.05.16 09:44

[the300] 정치 혐오 심화 속 의회민주주의의 위기

예산안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찾은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여야 지도부와 회동을 마친 후 귀빈식당을 나서고 있다. 2014.10.29/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만약 정치 발전이 퇴보하지만 않는다면 20년 내 유럽에서 의회가 사라질 것이 확실하다."

그는 독재자였다. 안토니오 데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포르투갈 총리는 1933년 국민투표로 헌법 개정에 성공한 뒤 의회민주주의의 종말을 정치 발전이라고 당당히 선언했다. 살라자르에게 의회와 정당은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존재였다. 그가 코임브라 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 쓴 논문 가운데 하나가 '정당정치의 무용론'이었다.

군인도 아닌 경제학자 출신이 무려 36년 간 민주주의의 근간인 의회를 부정하고 독재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법'에 꽤 여러 국가가 관심을 가졌다. 그 중 우리나라의 군부정권도 포함돼 있던 모양이다. 살라자르가 우민화 정책으로 사용했던 '3F'(Futebol, Fatima, Fado; 축구, 종교, 음악) 정책은 1980년대 '3S'(Sports, Sex, Screen) 정책에 차용됐다.

살라자르는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추종자였다. 1910년 왕정 붕괴 후 제1공화국의 혼란한 정치 상황에 대한 국민들의 피로감을 정치 혐오로 몰고가며 정치 무관심을 부추기는 데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했다. 포르투갈 국민들은 다수가 가톨릭 신도였고 교육 수준이 낮은 농촌 주민이 대부분이었다. 왕정과 가톨릭 세계관에 익숙했던 이들은 자못 무질서해 보이는 의회민주주의보다 권위주의적 체제에 더 친숙함을 느꼈다.

민주주의는 '부패한 이념'으로 내몰리고 그 자리를 '질서, 규율, 전통'과 같은 도덕적 가치들이 대신했다. 포르투갈은 날로 낙후돼 갔지만 살라자르는 "의회의 무능은 다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재자를 요구하는 요란한 군중의 외침을 만들어 낸다"는 모리츠 본의 지적을 충실히 활용하며 1968년 뇌일혈로 쓰러질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바로 '살리자르의 덫'이다.

2015년 대한민국,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날로 깊어지고 있다. 이를 기가 막히게 잘 활용하는 이가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국회를 '공공의 적'으로 몰아세우며 이에 대비되는 자신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지지율을 관리하고 있다. 국민들의 눈에 국회는 '성완종 리스트'에서 보듯 부패하고, 공무원연금 개혁 협상에서 보듯 반(反) 개혁적이며 국민연금 명목소득대체율 논란에서 보듯 엉뚱하다.

박 대통령의 정치 불신과 정치 혐오를 지렛대 삼아 '할 일을 하지 않는' 국회를 향해 한숨을 내쉬기만 하면 된다. 한 정치 분석가는 "야당이 '야당답게' 저항해보려 해도 '평론가처럼' 국회를 비난하는 대통령이 그나마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효과를 일으킨다는 점이 국회의 비극"이라고 했다.

여야가 서로 강공 모드로 치달을수록 이러한 구도는 더욱 강화된다. 무능과 무책임의 대가를 여야가 모두 뒤집어쓰는 '마이너스섬' 게임이다.

이런 구도를 깨려면 의회민주주의의 가치를 국회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수 밖에 없다. 여야가 국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살라자르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

2005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뒤 공화당이 상하 양원마저 장악하면서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결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민주당은 연방법관 인준 과정에서 필리버스터를 남용해 인준을 자주 지연시켰고, 공화당은 토론 종결 정족수를 5분의 3에서 과반수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토론과 타협으로 합의를 이루는 의회민주주의의 전통이 파괴될 위기였다.

이때 이른바 '14명의 갱'(Gang of 14)이 나섰다. 공화당 의원 7명이 토론 종결 정족수 변경에 반기를 들었고, 민주당 의원 7명은 비상상황이 아닌 경우 필리버스터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공화당 또는 민주당원이기 이전에 의회민주주의자였고, 그들의 적은 상대 정당이 아닌 '의회민주주의 파괴자'들이었다.

지금 우리 국회가 싸워야 할 진짜 적은 누구일까. 의회민주주의의 종말이 정치 발전으로 여겨지는 날이 와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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