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편성권을 쥔 정부와 이를 심사하는 국회간 본질적인 갈등이 예산 시즌이 본격화하면서 표면화하고 있다. 지난달 국회운영위 예산결산소위에서 157억 9900만원 규모의 국회 예산정책처 예산을 심의하다 여당이 의결을 보류하면서 갈등은 '폭발' 수준으로 비화됐다. 예산갈등이라면 흔히 정부가 마련한 예산에 야당이 문제를 제기하는 구도를 떠올리지만 정부와 여당이 합심해 국회 예산정책처 예산을 문제 삼으면서 내년도 예산심사에 제동이 걸렸다.
◇힘세진 기재부 vs 위상강화 국회..국회선진화법 여파?
예결특위 파행은 행정부와 입법부, 그 중에서도 예산을 편성하는 기획재정부와 국회 간 힘겨루기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정부 예산안을 뜯어보는 게 본연의 역할인 예정처의 보고서가 여야를 넘어 정부와 국회간 대립의 불씨가 됐다.
2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야당은 교과서 국정화 예비비 관련 최경환 부총리 답변을 문제 삼아 예산심사를 잠정 거부했다. 최 부총리는 야당의 거듭된 예비비 명세서 제출요구에 "예비비 자료제출은 삼권분립 정신에 위배된다"며 강하게 맞섰다.
앞서 예정처는 야당의 예산 관련 질의에 대해 역사교과서 국정화 예산을 6억5000만원으로 추정하는 회답을 보냈고, 야당은 이를 근거로 정부의 예비비 44억원 편성이 과도하다고 지적했다. 새누리당과 최경환 부총리는 "현실과 동떨어진 근거"라며 반발했다.
국회는 평소 정부에 대해 견제 목소리를 높이지만 정기국회 예산심사 시즌이 되면 기재부 눈치를 안 볼 수 없다. 1년 살림살이에 드는 비용을 사실상 기재부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예산안과 예산부수법안이 12월2일까지는 처리되도록 한 이후 기재부의 파워는 더욱 커졌다.
종전엔 국회가 설령 시한을 넘기더라도 벼랑끝 협상으로 예산안에 국회 의견을 반영할 수 있었다. 지금은 좋든싫든 심의, 의결하지 않으면 기재부의 예산안 원안이 그대로 통과된다. 기재부가 여야에 굳이 '저자세'로 나올 필요가 없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예정처, 눈엣가시? "과학적 분석 시도"-"편향됐다"
이런 가운데 예정처 예산에 제동이 걸린 것은 예정처가 그동안 정부에 비판적이거나 입장이 다른 연구결과를 내 온 데 따른 후폭풍 성격이 짙다.
경제성장률 예측이 대표적이다. 예정처는 내년도 실질경제성장률 전망치를 3.0%로 정부 전망보다 0.3%p 낮게 제시했다. 명목경제성장률도 정부 4.2%보다 0.2%p 낮은 4.0%, 2007~2014년 평균 전망치도 정부보다 0.6%p 짜게 줬다.
예정처는 지난 7월 11조8000억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안(추경)에 포함된 사업들이 4개중 1개꼴로 문제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자 야당과 예정처, 청와대와 기획재정부가 각각 같은 편에 서서 공방이 확전됐다.
특정지역 편향성마저 제기됐다. 조원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는 지난 22일 국회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예정처가 대구경북(TK) 예산에 지나치게 비판적이라고 지적했다. 김준기 예정처장이 "과학적으로 편향성 없는 분석을 하려고 시도했다"고 답변하자 "시도는 했는데 결과에 편향성이 있다"고 일갈했다. 이쯤 되면 예정처가 여당에게 눈엣가시가 됐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예정처의 보고서가 문제가 된 것은 현 정부 들어서만의 일은 아니다. 정부를 견제하고 정책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입장은 설립초기부터 이어져 왔다.
초대 최광 처장(2003. 10월~2004. 11월)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2003년도 결산에 대해 국고금관리법상 취지에 맞지않는 전용사례, 과다한 예비비 책정과 불용 등을 적시했다. 2004년도 추가경정예산안에는 "재정지출의 확대는 민간소비와 투자를 억제 하는 효과(구축효과)가 있고 정책시차가 존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부가가치나 고용유발 효과는 크게 반감될 것"이라고 평가하는 등 당시 참여정부를 불편하게 했다.
최 전 처장은 현 정부에서 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장으로 최근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 인사 논란의 가운데 사퇴한 인물이다. 굳이 따지자면 지금의 여당쪽 인사다.
예정처는 정부 견제 목소리를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달 30일 2015 세법개정안 토론회에서 "청년고용증대세제 신설, 해외주식투자펀드 비과세 등은 국내외 경제의 불확실성으로 정책효과가 제한될 우려가 있다"며 비과세·감면제도 정비 미흡으로 예년 대비 세수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