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박근혜 노무현…라인의 추억

심재현 기자
2016.04.07 06:00

[the300]

국회에서 여야 정당을 취재하다 보면 정당별로 대변인실에서 만든 수첩을 받는다. 소속 국회의원의 연락처와 직위, 선수(選數) 같은 정보가 손바닥만한 종이에 빼곡히 담겨있다. 정당마다 모양새는 다르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기자들 사이에선 수첩이 하나 더 돌아다닌다. 공식 인쇄물은 아니지만 좀더 깊숙한 내용이 적혀있다. 시쳇말로 계파 정보가 들어있다. 8~9년 전 국회를 출입할 때만 해도 취재경력이 오랜 선배들에게 물어 듣거나 중진의원 일부가 등장한 '족보'를 암암리에 돌려보는 정도였던 게 지금은 300명 전원으로 확대되고 세분화됐다.

정당에 새로 출입하는 기자들은 휴대전화에 국회의원이나 보좌진의 연락처를 저장할 때 이걸 바탕으로 아예 '홍길동 의원 ○○계'라고 적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만큼 현실적인 정보라는 얘기다. 국회를 다시 취재하게 되면서 계파를 혼동해 엉뚱한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다가 머쓱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정치현실이 고스란히 압축된 선거정국에서도 이 수첩은 유용하게 쓰인다. 공천과정 내내 수첩을 들고 살았다. 새누리당만의 얘기가 아니다. 분당사태를 맞은 더불어민주당과 새정치를 내건 국민의당 때문에 수첩을 뒤적거린 적이 적잖다. 최근에는 잠시 정계를 떠난 유력인사들이 지원유세에 나선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수첩을 편다.

필요에 따라 수첩을 꺼내지만 찝찝함을 덜 수 없는 것은 조폭문화 못잖은 계파정치의 맹목적 때문이다. 소신과 공감보다는 배신과 보복, 편가르기가 요새 정치판의 구호가 됐다.

금배지를 단 이들은 각자가 소신에 따라 법안을 낼 수 있는 헌법기관이라는 말을 달고 산다. 두돈도 안 되는 금배지에 막대한 권한을 주는 것도 그 소신과 양심에 기대 활동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정당사에서 이를 실천한 이들이 없진 않다. 1990년 1월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3당합당을 선언하자 초선 의원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의 있습니다"를 외쳤다. 총재의 면전에서 반기를 든 소신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토대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도 2001년 한때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게 반발해 정치개혁을 위한 탈당의 길을 걸었다.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라는 정당정치의 연원을 거슬러오르면 계파를 부정적으로만 보긴 어렵다. 하지만 조직보다 소신을 앞세웠던 두 전·현직 대통령마저 또다른 계파문화의 그림자로 남은 현실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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