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自主獨立)이오."(백범일지 중에서)
백범(白凡). 당시 가장 미천한 신분이었던 백정(白丁)의 백(白)과 평범한 사람을 뜻하는 범부(凡夫)의 범(凡)자를 따서 호로 삼았다. 천한 백정과 무식한 범부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자신만큼의 애국심은 갖게 하자는 의미였다.
그의 호가 의미하는 것처럼 그는 나라를 잃은 절망적 상황에서 사람들의 애국심을 고취했지만, 불우한 '백범'들 사이에서 그들의 실패와 슬픔을 스스로가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패 속에서도 그는 74년의 생애 동안 광복과 통일이라는 자신과 민족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당시 10명 중 9명은 사망한다고 알려진 천연두를 앓았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17세 때 진사가 되기 위해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시험에 응시했다. 하지만 당시 과거제도는 매관매직으로 물들어 타락했기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부패한 세태를 개혁하고자 동학에 가입했다. 탐관오리 척결과 외세를 몰아내자는 기치 아래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해주성을 공격했으나 관군에게 대패했다. 일본군을 피해 도착한 만주에서 의병단에 가입해 일본군 토벌에 나섰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05년 11월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폐기를 상소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하며 국권침탈을 막고자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상하이로 망명,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연속된 실패 끝에 임시정부 활동을 하며 일정부분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휘, 성공시킴으로써 광복에 대한 의지를 전세계에 알렸다. 비록 그가 바란 것처럼 자력으로 나라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그의 활동은 광복에 밑거름이 됐다.
광복 이후에는 통일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주장했다. 그는 실제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협상에는 실패한다.
좌절할 법도 했지만 그는 끝까지 통일에 대한 열망을 거두지 않았다.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호소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남북이 통일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서 활동하던 그는 67년 전 오늘(1949년 6월26일)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암살당했다. 하지만 죽음 이후 통일에 대한 그의 의지는 수많은 백범들의 '소원'으로 이어졌다.
스스로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지만 절망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광복에 대한 의지 불어넣고 통일의 꿈을 제시한 백범 김구 선생은 '민족의 스승'으로 기억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