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한반도 비핵화'가 언급된 데 대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총무부장 명의의 담화로 대응 수위를 높였다. 중국·러시아 등 최우방국이 참여한 회의인데도 비핵화 언급이 빠지지 않은 데 대한 실망과 함께 핵 무력 강화 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27일 북한 대외 매체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 부장은 담화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헌법을 무시하고 미국이 선창하는 비핵화 타령에 동조한 ARF의 노골적인 적대적 태도를 강한 불만을 표시하며 이를 가장 엄정한 수사적 표현으로 단호히 규탄·배격한다"고 밝혔다. 특히 "이미 개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 '조선반도(한반도) 비핵화'에 아직도 집착하는 것은 전략적 사고와 논리의 실패이며 우매하고 어리석은 망상의 발로"라고 비난했다.
앞서 25일 발표된 ARF 의장성명에서 인도·태평양 지역 외교장관들은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우려하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이행과 비핵화 및 대화를 촉구했다. 성명에는 지난해에 이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표현이 포함됐다.
정부는 이번 ARF 성명은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입장이다. 윤민호 통일부 대변인은 "정부는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통해 날로 증대되고 있는 북핵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해 북핵 우선 중단에 중점을 두고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해법을 마련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김 부장의 이번 담화는 정상 국가임을 표방하며 외교 창구를 넓히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한반도 비핵화 의지가 성명에 담긴 데 대한 불만 성격도 있어 보인다.
특히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상 묵인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가 회의에 참석했지만 '비핵화'가 성명에 담겼다는 실망감이 반영됐을 가능성이 있다.
김 부장은 "국가 헌법에 의해 영구 고착된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법적 구속력이 전혀 없는 문서장 하나로 변경시켜 보려는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의 행위는 부질없는 짓"이라며 "아세안지역연단이 진정으로 지역의 평화와 안전보장을 도모하는 협의체로서의 사명을 다하려면 미국의 어용 나팔수로 도용되는 기회와 공간을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최선희 북한 외무상이 ARF에 가지 않은 이유가 성명에서 확인된 것"이라며 "최 외무상이 회의에 참석했음에도 북한 핵 문제가 논의되고, 비핵화가 성명에 담겼다면 북한 외교의 완전한 실패이자, 패배가 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부장은 이번 담화에서 핵보유국 지위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핵능력은 순간의 정체도 없이 부단히 갱신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북한은 그간 다자회의 계기 때마다 북한 비핵화와 관련해 김 부장의 담화로 직접 반박해 왔다. 국제 외교무대의 한반도 비핵화 관련 공식 문서화나 성명을 묵과할 경우 국제 기준으로 고착될 가능성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외부의 비핵화 요구를 빌미 삼아 자신들의 핵 무력 강화 및 도발 행위, 나아가 대(對)러시아 파병 및 무기 지원 등을 방어적·정당한 조치로 포장하려는 시도로도 분석된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향후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압박 기조와 북한의 군사적 도발 및 핵능력 고도화 간의 치열한 강대강 구도가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