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엘(the L) / 법관과 판결 ◇
고영한 대법관(61·연수원 11기)은 통상임금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는 판결에서 주심을 맡은 바 있다.
김신(59·12기)·김창석(60·13기) 대법관과 함께 2012년 8월2일자로 임명됐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제청해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임명했다.
다음은 고 대법관의 주요 판결들.
◇ "정기상여금도 통상임금…추가 소급할 의무는 없어"
고 대법관은 2013년 12월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하지만 과거 소급분에 대해서까지 모두 지급할 필요는 없다는 취지의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주심을 맡았다.
통상임금은 근로에 대해 정기적·일률적·고정적으로 지급되는 임금을 뜻한다. 연장·휴일근로수당을 계산하는 기준이 된다.
노동계와 재계는 매달 받는 기본급과 달리 분기마다 또는 명절마다 일정하게 나오는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하는지를 둘러싸고 충돌했다. 대부분 기업들은 관례적으로 정기상여금을 제외한 금액을 통상임금으로 보고 연장·휴일근로수당을 계산해왔는데, 노동계에서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재계는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는 것이 노사 간 합의에 따른 관행이라고 주장했고, 노동계는 정기상여금의 성격이 통상임금과 다를 바 없는 만큼 잘못된 관행이라고 맞섰다.
통상임금을 둘러싼 소송이 줄을 잇고 하급심에서 엇갈린 판결들이 나오는 가운데 전원합의체는 사실상 절충안에 해당하는 판결을 내놨다. 정기상여금의 성격에 대해서는 노동계의 주장을 받아들여 통상임금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소급분 청구까지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전원합의체는 "노사 양측이 임금협상 당시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면, 사측은 이를 전제로 기본급과 수당 등 인상률을 조정하는 등 대안을 마련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임금협상의 경위나 방법 등은 도외시한 채 협상 당시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이유로 추가 법정수당을 지급하도록 요구해 기업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면 노사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설명했다.
특히 전원합의체는 임금협상 과정에서의 '신의성실의 원칙'을 강조해 재판보다 신뢰에 의한 양측의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메시지를 던졌다는 해석도 나왔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당사자 사이에 의무를 이행하는 데 있어 신의와 성실이 전제가 돼야 한다는 민법상의 대원칙이다.
그러나 일부 대법관들은 "당혹감마저 든다"는 표현을 담아 강하게 반대했다. 이인복·이상훈·김신 대법관은 반대의견에서 "근로기준법의 강행규정성을 인정하면서도 신의칙을 이유로 그 강행규정성을 배척하는 논리는 너무 낯설다"며 "거듭 살펴봐도 논리에서 합리성을 찾을 수 없다"고 밝혔다.
바꿔 말해 노사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것과는 무관하게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이라고 판결하면서도 그 합의 내용을 이유로 과거 소급분은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은 모순된다는 논리다.
이 판결은 통상임금을 둘러싸고 다퉈온 재계와 노동계에 기준을 마련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법리뿐 아니라 현실적인 재계의 상황과 임금협상 과정까지 고려한 판결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동시에 노동계의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후 고 대법관은 이듬해 5월에도 소부 주심으로서 비슷한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1부는 한국GM 근로자들이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해 그간 지급하지 않은 추가근무수당을 지급하라고 사측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취지로 사건을 파기해 하급심으로 돌려보냈다.
◇ "민주화운동 보상과 별개로 위자료 청구 못해" 판결에 반대 의견
고 대법관은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해 손해를 입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 대해 국가에 배상 책임이 없다는 취지의 판결에서 전원합의체 주심을 맡았다. 다른 대법관들과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된다는 취지의 의견을 냈지만 다수의견에 밀려 판결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김우종 전 경희대 교수 등 '문인 간첩단 사건' 피해자 7명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문인 간첩단 사건은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문인들을 간첩으로 몰아 처벌한 사건이다.
김 교수 등은 유신헌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불법 연행돼 가혹행위를 당한 끝에 범행을 허위 자백하고 집행유예 판결을 확정받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재심을 권고했고, 김 교수 등은 재심 끝에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민주화운동보상법상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지정돼 생활지원금(보상금)을 받았던 김 교수 등은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받은 이후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정부는 피해자들이 보상금 지급 결정에 동의하고 생활지원금을 받아온 만큼 추가로 이미 배상이 이뤄졌다는 논리를 폈다.
고 대법관은 이상훈·김용덕·김창석·김소영 대법관과 함께 "억울한 복역으로 피해자들이 입은 정신적인 손해는 재심 판결에 의해 새로 밝혀졌다"며 반대 의견을 냈다. 김 교수 등이 재심 판결 전에 보상금 지급 결정에 동의했지만, 이를 이유로 손해배상 청구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면 공평과 정의의 관념에 어긋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의견은 반대의견으로 남았다. 전원합의체에 참여한 나머지 대법관들이 모두 국가 측 주장을 인정했고, 이같은 판단이 판결로 이어진 것이다.
다수 대법관들은 "김 교수 등이 보상금 지급 결정에 동의한 이상 재판상 화해와 동일한 효력이 생겼다"며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입은 피해에 대해 위자료를 청구할 수 없다"고 밝혔다.
◇ "투여하는 용법·용량 추가됐다면 의약품 발명으로 인정"
고 대법관은 또 지난해 5월 투여용법과 용량이 의약품 발명 구성요소가 될 수 있다는 판결에서 전원합의체 주심을 맡았다. 투여용법 등이 추가됐다면 새로운 발명품으로 인정할 수 있고, 특허권을 받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제일약품은 2012년 브리스톨이 특허권을 가진 B형 간염 바이러스 치료제 엔테카비르에 대해 투여량을 1㎎, 투여 주기를 1일 1회로 정하는 사용법을 새로 개발했다. 아울러 특허심판원에 "투여용법과 용량은 자유실시기술에 해당하는 만큼 브리스톨의 특허권 범위에서 벗어난다"며 소극적 권리범위확인심판을 청구했다.
특허심판원이 제일약품의 주장을 받아들이자 브리스톨은 소송을 냈다.
전원합의체는 특허법원과 마찬가지로 제일약품의 손을 들어줬다. 투여용법과 용량이라는 새로운 의약용도가 추가된 만큼 특허의 요건인 신규성·진보성을 갖췄다고 본 것이다. 전원합의체는 "의약이 부작용을 최소화하며 효능을 온전하게 발휘하려면 투여용법과 용량을 적절하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투여용법과 용량이 발명의 요소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세계적으로도 논의가 벌어지고 국내에서도 견해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지침을 마련한 판결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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