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년 전 오늘...日 통감부 설치, 자주권 뺏고 고문정치 시작

진경진 기자
2016.02.01 05:45

[역사 속 오늘]이토 히로부미 초대 통감 부임, 군대 해산 및 외교·사법·경찰권 박탈

서울 중구 남산에 자리하던 조선총독부 전경. 조선통감부는 조선총독부의 전신이다./사진=위키미디어

1906년 2월1일.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황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에 조선통감부를 설치했다. 사실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고문 정치'에 돌입한 것이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독자적으로 간섭할 수 있게 되자 침략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결과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는 권한을 가지도록 했다.

하지만 통감부는 외교 뿐 아니라 행정·금융·종교·교육 등 국정 전반을 지휘·감독하면서 한국의 통치 조직을 해체하는 역할을 했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다. 설립 후 한달은 하세가와 요시미시가 임시통감을 맡았고 이토는 3월2일부터 정식 취임했다. 통감은 일본 천황에 직속한 관리로 규정했는데 이는 한국을 천황의 통치권 안에 있는 지역으로 간주한 것이었다.

통감은 행정 전반에 대한 집행을 한국 정부에 요구할 수 있었다. 집행 후 한국 정부에 일방적으로 통보할 수도 있어 조선 국정을 장악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재무·경무 부분은 일본인을 고용해 일본 내각과 비슷하게 운영했고 한국 정부가 고등 관리를 임명할 때도 통감의 동의를 반드시 받도록 했다.

특히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이완용 등 친일 내각과 한일신협약을 체결했는데 이후 한국의 통치권은 사실상 통감에게 넘어갔다.

한국 대신들의 정기·임시 회의는 통감 관저에서 열렸고 주요 행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시정 개선이라는 명분으로 통감의 뜻을 강요했다.

한국의 안녕과 질서 유지라는 기능은 우리 국민의 저항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목적으로 활용됐다. 통감부의 통치가 강화될수록 국민의 저항도 세졌는데 일본은 헌병·경찰·군의 무력을 동원해 이를 탄압했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 문제였던 간도 영유권은 본래 통감부의 기능인 외교를 명목삼아 청에 넘겼고 대신 일본은 만주 개발권을 얻는 등 대륙 침략 정책에도 활용했다.

통감부는 1910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기 전 4년 6개월 동안 조선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고 사법권과 경찰권을 박탈하는 등 한국이 모든 자주권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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