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고려 말,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가고 중국 본토를 차지한 명나라는 이전의 원나라 땅은 모두 자신들의 소유라고 주장했다. 한때 원나라가 점령했던 고려의 철령 이북 땅에도 철령위를 세우겠다고 결정했다. 이 지역은 원나라 세력이 약해진 후 고려의 공민왕이 되찾아온 땅이었다.
이에 고려 조정은 크게 반발하고 최영 장군을 중심으로 이성계와 조민수 등에게 명나라의 전진 기지인 요동 정벌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반대하며 최영 장군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성계의 의견은 묵살당했다. 어쩔 수 없이 요동정벌에 나선 이성계는 위화도 부근에서 큰 비를 만나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성계는 결국 지원받은 군사와 개인사병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개경을 점령했다. 위화도 회군이었다. 그곳에서 최영 장군을 제거하고 고려의 신진사대부와 결탁해 우왕을 폐위시켰다.
이후 신진사대부는 개혁을 추진하되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온건파'와 새로운 국가를 세우자는 '급진파'로 나뉘었다. 이성계는 정도전 등 급진파와 함께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로 했다.
하지만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선 더 많은 인재들이 필요했다. 이 중 한 명이 온건파의 핵심 인물인 정몽주였다. 정몽주는 최영 장군이 요동정벌을 밀어붙일 당시 정도전과 함께 이성계 편에 섰지만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엔 반대했다.
그는 이성계 세력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리고 정도전을 유배보내는 등 고려 왕조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새로운 국가 건설을 꿈꾸는 이들에게 정몽주는 걸림돌이었다. 결국 조선 건국을 꿈꾸던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술상을 차려놓고 마지막으로 정몽주의 마음을 떠봤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하여가(何如歌)) 고단한 인생 대신 자신들과 뜻을 함께해 서로 사이좋게 살아가자는 일종의 회유였다.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화답했다. 이미 기울어가고 있던 고려지만 끝까지 지키겠다는 의지였다. 정몽주의 마음을 확인한 이방원은 그를 살려둘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습격해 피살했다. 1392년 4월4일. 정몽주 나이 56세였다.
그후 624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있는 선죽교 위 붉은 빛은 정몽주의 핏자국이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선죽교(善竹橋)라는 이름도 피살 이후 다리 주위에 충절을 뜻하는 대나무가 자란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후에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비록 정몽주를 내 편으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가 죽은 지 13년이 되던 해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했다. 문충이라는 시호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