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전 오늘…'실미도 부대' 北이 아닌 청와대로 향하다

이슈팀 권용범 기자
2016.08.23 06:00

[역사 속 오늘] '살인병기'로 키워진 31명의 북파공작원

1971년 8월23일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 버스에서 수류탄이 터졌다. 버스에 타고 있던 이들은 주석궁으로 갔어야 할 24명의 북파공작원, ‘실미도 부대원’이었다. 45년 전 오늘, 그들은 왜 북한이 아닌 청와대로 향해야만 했을까.

이 일이 있기 약 3년전인 1968년 1월21일 북한특수부대 소속 31명이 서울 세검정 고개에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명 '1·21 사태'로 당시 우리 군경과의 교전으로 이들 중 30명이 사살됐다. 이날 생포된 김신조는 "박정희, 목따러 왔수다"라는 말로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왔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를 계기로 박정희 정부는 4월1일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동시에 북한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평양의 주석궁을 습격하기로 하고 31명의 전과자와 민간인을 모았다. 31명이라는 숫자는 박정희 암살을 시도한 북한특수부대의 침투조 인원수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그렇게 1968년 4월, ‘2325 전대 209 파견대’가 만들어졌다. ‘684부대’라고도 불리는 실미도 부대가 창설되는 순간이었다. 중앙정보부가 예산지원과 정기적인 훈련 상태 점검을 맡았고 공군이 전반적인 부대 운영과 훈련을 책임졌다.

이들은 인천에서 20km 떨어진 곳에 있는 외딴 섬 실미도에 격리·수용되어 지옥 훈련을 받았다. 실전과 똑같은 철저한 훈련과 비인간적인 대우 속에서 7명은 훈련 중 사망했다. 인민군식의 혹독한 훈련 과정을 거치며 단 3개월 만에 북파가 가능한 인간병기로 거듭났다. 그로부터 3년4개월 동안 출동명령만을 기다렸다. 목표는 오로지 하나. 북한에 침투해 김일성 주석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획이 틀어졌다. 1970년대 초 데탕트, 즉 미국과 소련의 긴장이 완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남북 간에도 화해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북파 임무가 취소되자 실미도 부대의 존재는 불필요해졌다. 정부는 이들의 존재가 외부에 공개될 것을 우려해 기간병들에게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실미도 부대원들은 1971년 8월23일 오전 6시, 한발 앞서 움직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만나 항의하고 담판을 짓기 위해 기간병들을 죽이고 청와대에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전체 24명의 기간병 가운데 18명이 살해당하고 단 6명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기간병들을 단숨에 제압한 인간병기 24명은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했다. 이어 인천에서 육군과 최초의 총격전을 벌였다.

이후 두 번째 버스를 빼앗은 이들은 오후 2시15분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했다. 군·경이 앞을 가로막은 상황에서 최후의 총격전이 벌어졌고 몰고 온 버스는 운전 미숙으로 가로수를 들이받았다. 수세에 몰린 실미도 부대원들은 버스 안에서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렸다. 부대원 20명이 죽고 4명만이 살아남았다. 생존 공작원 4명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972년 3월10일 총살형을 받고 사형 당했다.

정부가 이 사건을 북한 무장간첩에 의한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발표하면서 30여년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실미도 부대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99년 백동호의 장편소설 '실미도'가 출판되고 그해 연말 시사교양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가 방영되고 나서다. 2003년 12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 '실미도'가 한국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실미도 사건이 전국민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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