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
37년 전 오늘(1979년 10월16일) 오전 10시 부산대학교 도서관 앞에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구호를 외쳤다. 독재집권층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선언문’이 부산대학교 일대에 배포됐다. 유신정권을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부마항쟁’의 시작이었다.
1979년 유신체제는 한계에 이르렀다. 박정희 정권의 비민주적인 독재가 이어지는 가운데 야당과 재야세력의 저항이 고조됐다. YH사건으로 야당 총재 김영삼의 의원직이 박탈되고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66명이 전원 사퇴안을 제출하자 국민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이에 유신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서울과 광주, 대구 등지에서 국지적으로 일어났다. 부산·경남지역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반대 투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널리 퍼졌다. 이 가운데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당긴 시위의 방아쇠는 시민들의 내면에 가라앉았던 투쟁심을 터뜨리는 계기가 됐다.
부산대 교내에서 시위 진영을 갖춘 학생들은 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했다. 학생들의 시위에 시민들은 열렬한 지지로 화답했다. 저녁 무렵에는 직장인과 노동자, 고등학생까지 합류해 시위대는 수만명으로 불어났다. 대학생이 주도했던 시위는 어느새 시민들의 민주 항쟁으로 성격이 변했다. 경찰은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발사하고 통행금지령을 내리는 등 강경 진압으로 맞섰다. 그러나 항쟁의 불길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10월18일 시위는 마산으로 번졌다. 이날 경남대학교 학생들은 3·15 의거탑에 집결해 구호를 외쳤다. 이후 직장인들과 시민들이 가세해 시위대는 대규모로 불어났다. 새벽 3시까지 전개된 시위에 마산시내는 과열됐다. 시위대는 파출소에 몰려가 기물을 파괴하고 경찰 차량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박정희 정부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사태가 심상치 않자 강경하게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부산 지역에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20일에는 마산 지역에 군을 주둔시켜 치안을 강화하는 ‘위수령’을 발동했다. 군이 투입되자 부마항쟁은 표면적으로는 단시간에 진압되는 듯 했다.
그러나 부마항쟁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산에 내려가 현장을 분석하다가 민심이 심상치 않다는 점을 감지하고 유화정책을 보고서에 올렸지만 경호실장 차지철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를 거절했다. 10월26일 김재규는 부마항쟁 수습책을 놓고 차지철과 격렬한 말다툼을 벌이다가 차지철과 박정희를 권총으로 살해했다. 이로써 18년간의 독재는 막을 내리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