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박근혜 전 대통령의 2층짜리 벽돌조 사저는 주인의 현재 처지를 대변하는 듯했다. 바로 옆 철근콘크리트조 고층건물들 탓에 햇볕이 잘 들지 않아 어둑어둑했다. 수년간 사람이 살지 않아 음산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따뜻한 봄 햇살이 내리쬐던 날씨가 무색했다.
사저 환경이 원래 이랬던 건 아니다. 동네 토박이들을 만나보고 주변 건물의 등기를 떼봤다. 박 전 대통령이 처음 여기로 이사 온 1990년에는 주변에 사저와 비슷한 높이의 저층 주택밖에 없었다. 햇볕도 잘 들었을 터다.
공교롭게 이후부터 고층 건물이 하나둘씩 지어졌다. 사저에 입주한 다음 해인 1991년 사저 남쪽에 5층짜리 상가 건물이 들어섰다.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해 한나라당 대표를 지내던 2005년에는 동쪽에 11층짜리 아파트가 자리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경선에서 패배하고 이명박 정권 2년 차를 보내던 2009년에는 서쪽에 7층짜리 아파트가 신축됐다. 그나마 북쪽에 일반 건물이 아닌 초등학교 운동장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
사저에 어둠이 드리워지는 사이 어느새 정계에서는 '불통' 이미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이었던 카리스마와 원칙은 단절과 고집불통을 낳기도 했다. 친박을 내세우는 사람은 많아도 박 전 대통령과 실제로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두운 사저를 떠나 빛나는 청와대에 입성한 지 만 4년 13일 만에 헌정 사상 1호 '파면 대통령'이 됐다. 사저는 예정에 없던 주인의 귀가를 바삐 준비 중이다. 쓸고 닦고 고장 난 설비를 손본다. 경호팀도 분주하다. 고층 건물들 사이의 사저는 경호를 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한 이웃 주민은 박 전 대통령의 기구한 정치인생이 볕 안 드는 사저와 무관치 않다고 혀를 찼다. 최고의 영광과 최악의 치욕이 대를 이어 휘몰아쳤으니 풍수지리학적 해석까지 나오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물론 일조(日照)에 문제가 있다고 이 같은 일이 생긴 건 아니다. 그러나 묘하게 겹치는 건 어쩔 수 없다. 모든 만물을 있는 그대로 밝고 투명하게 비추는 햇볕, 얼어 붙은 마음마저 풀어주는 따뜻한 햇살이 비켜가 버린 사저, 어둑한 그 속에서 오랜 기간 칩거하며 살아간 주인, 그리고 최순실.
적어도 이것만큼은 분명하다. 어둠, 폐쇄적 사고, 독선적 행동, 비선 따위의 단어는 더 이상 미래 정치와 어울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