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세 청년 몸의 9개 칼자국…26년 전 이태원의 비극 [뉴스속오늘]

채태병 기자
2023.04.03 06:05
[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사진=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스틸컷

한 패스트푸드 음식점에서 장근석(피어슨 역)과 신승환(알렉스 역)이 대화를 나눈다. 이때 장근석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너 사람 찔러본 적 있냐"며 잭나이프를 꺼내 펼쳤다. 그들의 옆으로 매장 안을 둘러보던 송중기(조중필 역)가 화장실로 들어간다.

그 모습을 본 장근석은 "뭔가 보여줄게. 따라와 봐"라며 화장실 문을 열고 송중기의 뒤를 따랐다. 장근석은 소변기 앞에 서 있던 송중기를 향해 9차례 흉기를 휘둘렀다. 목과 어깨 등에 자상을 입은 송중기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뒤이어 화장실에 들어와 현장을 목격하고 경악하는 신승환의 얼굴과 피투성이가 된 장근석의 얼굴이 교차한다. 이는 2009년 개봉한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의 한 장면으로, 실제 사건을 카메라에 담아낸 것이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건은 1997년 4월 3일 밤 10시께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한 햄버거 가게 남자 화장실에서 벌어졌다. 당시 22세 대학생이었던 조씨는 가게의 화장실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채 발견됐다.

신고를 받고 119 구급대가 신속하게 출동했지만, 왼쪽 목 동맥이 절단되는 치명상을 입은 조씨는 과다 출혈로 인해 싸늘한 주검이 된 상태였다.

사건 다음날 범인이 아더 존 패터슨이라는 익명의 제보가 미합중국 육군범죄수사사령부에 접수됐다. 관련 내용을 전달받은 수사 당국은 당시 17세였던 미국인 패터슨과 그의 친구 18세 에드워드 건 리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검찰의 부실 수사…패터슨의 美 출국으로 사건 표류
1997년 4월 3일 발생한 '이태원 살인 사건'의 진범인 아더 존 패터슨. 대법원은 2017년 1월 25일 패터슨에 대한 상고심 선고에서 징역 20년을 확정했다. /사진=뉴스1

용의자들에 대한 수사를 마친 경찰은 두 사람을 살인 혐의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미합중국 육군범죄수사사령부 역시 패터슨이 피해자 조씨를 흉기로 찔렀다고 의견을 정리해 검찰에 보냈다.

하지만 검찰은 이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합리적 근거도 없이 초동 수사 결과를 번복했다. 검찰은 "범인은 에드워드"라고 주장한 패터슨의 진술만 믿고 에드워드에게 살인 혐의를, 패터슨에게 증거인멸 및 흉기 소지 혐의를 적용해 구속 기소했다.

이후 1심과 2심 재판에서는 두 사람의 유죄가 인정됐지만, 대법원은 1998년 4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에드워드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사건을 재검토해 같은해 9월 에드워드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때 사건의 진범인 패터슨은 흉기 소지 등 혐의로 기소돼 재판부로부터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하지만 패터슨은 수감 태도가 좋다는 이유로 1998년 8월 15일 광복절 특별사면을 받았고, 그는 검찰이 출국정지 기간을 연장하지 않은 틈을 타 1999년 8월 미국으로 떠났다.

사건 발생 14년 만에 '살인 혐의' 기소
'이태원 살인사건'의 진범 아더 존 패터슨이 2015년 12월 사건에 대한 현장 검증에 참여하는 모습. /사진=뉴스1

검찰은 패터슨을 사건의 진범으로 지목하고 재수사에 돌입했지만, 패터슨의 출국으로 수사는 진전 없이 표류했다. 이후 검찰은 패터슨이 진범이라는 수사 결과를 내놨고, 그가 미국으로 떠난 지 10년 후인 2009년이 돼서야 미국 당국에 패터슨 인도를 청구했다.

검찰이 미국에 인도 청구를 한 지 약 2년이 흐른 2011년 5월 패터슨이 로스앤젤레스(LA)에서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검찰은 같은해 12월 패터슨을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사건 발생 14년 만에 진범이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것이다.

이후 패터슨은 2015년 9월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한국 땅으로 돌아왔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그는 여전히 "범인은 내가 아니라 에드워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2016년 1월 패터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고, 대법원 역시 2017년 1월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 없이 (범행 사실이) 충분히 증명됐다"며 원심을 확정했다.

"부실 수사 인정"…유족, 국가 상대 손해배상 '승소'
'이태원 살인 사건' 피해자 고(故) 조씨의 어머니 이복수씨가 2016년 1월 아더 존 패터슨이 1심 재판에서 징역 20년 선고받은 것과 관련해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스1

피해자 조씨의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검찰 측은 "배상 책임이 인정되면 앞으로 검사가 어떻게 자유롭게 수사할 수 있겠냐"고 항변했지만, 재판부는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2018년 7월 서울중앙지법은 유족이 정부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검찰이 초동 수사를 잘못했고 이로 인해 유족은 수년간 진상 규명을 위한 추가 수사를 요청했다"며 "검사들은 적정한 방법으로 수사를 진행해야 할 의무가 직무상 의무가 있었지만, 2009년이 돼서야 미국에 범죄인 인도 청구를 했다"고 질타했다.

이어 "유족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다"며 "국가는 조씨 부모에게 각 1억5000만원을, 누나 3명에게는 각 2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정부 측은 항소했으나 2019년 2월 서울고등법원은 1심과 같이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정부는 2심 결과에도 불복해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해당 사건을 본안 심리 없이 기각했고, 이로써 유족에 대한 국가의 배상이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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