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20일, 의대증원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하면서 '의료대란' '의료공백'이 현실화했다. 한때 세계적인 모범사례로 평가받던 'K-의료'는 뿌리부터 흔들리며 취약성을 드러냈다. 공감·연민 대신 비판·비난이 가득한 지난 1년을 보내며 환자와 의사는 모두 '피해자'로 전락했다. 진료 기회를 박탈당한 환자와 과로에 내몰린 의대 교수. 학교와 병원을 떠난 의대생과 전공의는 저마다 울분·상처·좌절·혼란이 가득하다. 미래의 의료를 위한 현실의 갈등은 해법을 찾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머니투데이가 의정갈등 1년을 보낸 의대생·전공의 환자·의대 교수의 속마음을 직접 들었다.
◇혼란한 의대생, "두려웠다"는 전공의
20대 의대생 강백호(가명)씨는 "이렇게 오래 휴학할 줄 몰랐다"며 한숨부터 쉬었다. 지난해 2월 의대증원 발표할 때만 해도 2020년처럼 한두 달 지나 합의 등 정리가 될 줄 알았다. 동기들은 "이번이 기회"라며 과외,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거나 가고 싶던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반년이 지나고부터는 "말도 안 되는 정책"이라던 당황의 감정이 "장난이 아니구나"라는 체념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남자 동기 절반은 2학기 복귀도 어려울 것이라며 군입대를 선택했다. 학교와 강의실에서 몸이 멀어지면서 '미래 의사'로서 정체성은 갈수록 희미해져 간다.
강씨는 "정신적, 체력적으로 최상인 시기에 공부 대신 게임을 하거나 일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이제는 '현타'가 온다"면서도 "휴학에 따른 유급과 제적 등 처분이 걱정되지만 의대증원의 파장을 직접 경험할 세대인 만큼 쉽게 수용할 수가 없다. 무엇도 정해지지 않은 올해 1년은 더 불안하고 혼란스럽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김찬규(원광대병원 응급의학과 사직전공의)씨의 '의정갈등 백서' 첫 장은 사직서를 쓰기 전날 밤이다. 그야말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결심을 굳혔지만, 사직서를 내야 하는 순간이 되자 심장이 요동쳤다. 김씨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나는 혼자였고 두려웠다"고 떠올렸다.
매일 초진을 본 환자의 경과와 입·퇴원 여부를 2시간씩 리뷰했다. 한 달에 22번 근무하고 일주일에 80여 시간을 진료했다. 동료에게 인정받고 환자에게 사랑받던 의사는 사직서를 낸 직후부터 관료와 언론의 협박과 이미지 공격의 대상이 됐다. 김 씨는 "한때는 분노가 전부였던 때도 있었다. 그 뒤에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이 매일 엄습했다"며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할지 스스로 답을 내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시험의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수기집을 써 책을 발간했고, 대통령실에 보냈다. 정치 아카데미에 참여하고 전공의 수련과 의무사관 후보생과 관련한 정책제안서를 썼다. 의료공급자(의사)가 아닌 의료소비자(환자)의 권익 보호를 위한 시민단체도 조직했다. 김씨는 "1년 동안 사회와 소통하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유기적 지식인'으로서 역할을 자각했다"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수 있지만 훗날 나의 '의정갈등 백서'를 볼 때 적어도 부끄럽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불안한 환자들, 말 없는 교수들
33세 김정문(가명)씨는 "지옥과 천국을 오갔던 한 해"라고 지난 1년을 기억했다. 결혼 3년 만에 지난해 1월 태어난 아들 두섭(가명)이는 신생아 요도하열을 앓았다. 소변이 나오는 요도 구멍 귀두 끝이 아닌 아래쪽에 있는 병이다. 곧바로 수술 예약을 잡았지만, 병원에서는 "전공의가 없이 10월 말이 가장 빠른 때"라는 답이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11월로 한 번 더 미룰 수 없겠냐며 또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전공의 사직 기간이 길어질 경우 내년까지도 수술이 밀릴 수 있다는 안내에 김씨는 좌절했다. 관련 카페에 들어가니 수술 지연 통보를 받았다는 글이 10개가 넘었다. '힘없는' 환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약간의 항의, 그리고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김씨의 아들은 지난해 수술을 마쳤고 현재는 건강하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치료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막상 어려워지니 눈물이 날 만큼 힘들었다"며 "말도 못 하는 1세 아기까지 애꿎은 피해를 받아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화가 났다. 아이가 또 아프기 전에 빨리 이 사태가 끝나기만 바랄 뿐"이라고 가슴을 쳤다.
중증·응급 환자를 살리는 필수 의료 분야는 의정갈등 이후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전공의들은 수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사직했고, 환자를 지키던 의사마저 병원을 떠나는 실정이다.
전국 188명에 불과한 외상전담 전문의(외상외과) 의사인 허윤정 천안단국대병원 충남권역외상센터 교수는 "후배 의사들에게 외상외과를 하지 말라 말한다"고 했다. 그는 "응급의료센터·권역외상센터와 같은 1차 중증·응급치료 관문도 배후 진료가 뒷받침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며 "외상외과는 원래 전공의가 없으니 괜찮지 않냐고 하는데, 초기 처치한들 뼈를 이어 붙일 정형외과, 얼굴을 재건해줄 성형외과가 없으면 환자가 나빠지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만 봐야 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의정갈등 1년에 권역외상센터의 상당수는 의사의 '조용한 사직'으로 제 기능을 잃어간다. 허 교수는 "전국에서 걸려 오는 전원 문의에 온종일 전화만 받기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라고 말했다. 다른 필수의료 분야도 사정은 비슷하다. 수도권 대학병원의 50대 내과 교수는 "당직 서면서 수면을 박탈당하다 보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올해를 어떻게 보낼지, 고민이 무엇인지 단체 대화방에서조차 아무 말 하지 않는다"며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진짜 사직서'를 낼 날이 올 것"이라고 씁쓸해했다.
의정갈등이 1년째 이어지며 환자 피해가 극심했지만 얻은 점은 있다. 경증환자까지 진료하며 의원급과도 경쟁하던 상급종합병원이 의료개혁을 통해 제 기능에 맞게 중증·응급환자에 집중하는 구조로 전환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감기 등 경증으로 응급실을 찾던 환자도 줄었다. 하지만 전공의 부재로 극심해진 의료진 소진, 연속성이 떨어지는 정부 지원 등으로 상급종합병원의 구조전환이 제대로 안착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18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10일 전국 응급실 내원환자 1만5179명으로 전공의 집단사직 이전인 지난해 2월 첫째 주 평시 하루 평균 내원환자 1만7892명 대비 약 15%(2713명) 줄었다. 경증환자의 응급실 방문이 줄어든 영향이다. 같은 기간 응급실을 방문한 한국형 중증도 분류체계(케이타스·KTAS) 4~5등급에 속하는 경증환자는 8285명에서 5506명으로 34%(2779명) 감소했다.
전체 응급실 내원 환자 중 경증환자가 차지하는 비율도 줄어들었다. 지난 10일 기준 36%로 지난해 2월 첫째 주 46% 대비 10%포인트 낮아졌다. 응급실 혼잡도가 낮아지고 의료진은 중증·응급환자에 보다 집중할 수 있게 된 효과가 있다.
정부가 의사 집단행동에 따른 비상진료체계를 운영하면서 응급환자에 집중하기 위해 경증환자의 응급실 진찰료를 올린 등의 영향이다. 지난해부터 경증환자가 권역응급의료센터와 권역외상센터,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 지역응급의료센터를 방문할 경우 진료비 본인부담률이 50~60%에서 90%로 인상됐다.
의료개혁 1차 과제 중 하나로 지난해 10월부터 상급종합병원의 구조전환 사업을 시행하며 상급종합병원의 중증·응급환자 집중도는 높아졌다. 3년간 10조원의 건강보험 재정을 투입하고 필수의료 수가와 중환자실 수가를 높이면서 상급종합병원의 중증 진료 비중을 50%에서 70%로 단계적으로 상향하는 사업이다.
이에 상급종합병원에서 경증환자 등은 진료를 보지 않고 2차 진료협력병원으로 환자를 회송한 건수가 지난해 11월 4565건에서 올해 1월 1만7760건으로 289% 증가했다. 2차 진료협력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후 상급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전문 의뢰도 같은 기간 859건에서 5267건으로 513% 늘었다.
아울러 상급종합병원이 경증환자를 받지 않는 대신 진료협력병원을 통해 신속하게 환자들을 이송 받는 '패스트트랙'을 구축해 상급종합병원 이용 시 대기 기간이 단축되기도 했다. 상급종합병원 중 32곳이 패스트트랙 전용 예약 슬롯을 운영하고 있으며 추가로 11곳의 상급종합병원도 상반기 중 전용 예약 슬롯을 도입할 계획이다. 한 상급종합병원은 전문의가 모두 하루 3~6명의 패스트트랙 예약환자를 할당받고 있다.
상급종합병원의 중환자실 비중은 증가했다. 47개 상급종합병원이 일반병상 3620개를 감축했고 대신 중환자실을 늘리면서 중환자실 비중이 지난해 9월 11.4%에서 지난해 12월 12.6%로 늘었다. 중환자 병상은 112병상 증가했다. 이 기간 5~6인실 병상은 37.4% 줄고 2~4인실 병상은 54.5% 늘었다.
이와 관련 복지부 관계자는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과정에서 지역의 진료협력이 강화되고, 중환자 진료 여건이 개선되는 등 중증·응급·희귀질환에 집중할 수 있는 전환점이 마련된 것"이라며 "앞으로 바람직한 전달체계로 이행이 차질없이 이어지도록 꼼꼼히 모니터링하고 지역 2차 병원 육성과 연계해 지역 완결적 의료체계가 구축될 수 있도록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다만 제도의 성공적 안착 여부는 지켜봐야 한다는 평가다. 한 보건행정 전문가는 "원래 상급종합병원이 중증환자를 보도록 기능이 돼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책이 의도대로 된다면 대단히 좋겠지만 3년간의 사업이 끝나면 지속적으로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이어질 수 있을지 등이 관건"이라며 "6개월 뒤 실제 상급종합병원이 수술 중심의 구조를 가는 것인지 등도 살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진료지원간호사(PA), 입원전담의 등이 추가 고용돼 전공의가 기능하던 인력을 대체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입원전담의 제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