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년전 1755년 11월 1일. 이날은 기독교의 축일 중 하나인 만성절(기독교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날)이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시내 각 성당은 경건한 신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미사가 막 시작된 9시20분. 리스본 밖 수백 킬로미터 지점에서 리히터 규모 8.7으로 추정되는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성당을 화려하게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이 산산조각나 신자들의 머리 위를 덮쳤다.
신을 찬양하는 기도 소리는 순식간에 비명으로 뒤바뀌었다. 내진 설계의 개념 따위는 없었던 리스본의 건물들은 힘없이 무너졌고 수많은 사람이 잔해에 깔려 희생됐다.
이 피해로 사망자만 4만~5만명이 발생했다. 도시의 85%가 파괴되는 역사상 최악의 참사였다. 훗날 영국의 역사가 토머스 켄드릭은 리스본 대지진에 대해 '5세기 로마 몰락 이래 가장 큰 충격'이라고 정의했다.
지진이 발생한 1755년의 리스본은 대항해시대의 영광을 간직한 세계무역의 중심지였다. 신대륙에서 들어온 금과 향신료로 번영을 누리던 항구 도시이자,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가톨릭 중심지였다.
이날 아침에도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을 맞아 성당마다 미사가 열렸다. 최근에는 '핼러윈'으로 불리는 기독교도 행사다. 거리는 축제의 행렬로 가득했다. 그러나 이날 지진으로 성당의 첨탑이 무너졌다. 설상가상으로 미사를 위해 켜놓은 촛대들이 쓰러지면서 도시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불길을 피해 부두로 몰려든 시민들은 40분 뒤 몰려온 15m 높이의 쓰나미에 휩쓸렸다. 화재와 해일, 여진이 이어지면서 리스본은 '세상의 종말'을 방불케 하는 지옥으로 변했다.
현대 지진학자들은 이 지진을 규모 8.7로 추정한다. 대서양을 따라 발생한 쓰나미는 스페인과 모로코 해안까지 닿았고,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해안에서도 파도가 관측됐다.
이날 지진으로 리스본 시내의 1만여 채 건물이 무너졌다. 왕궁과 국립도서관, 미술관이 모두 불타 없어졌고, 루벤스와 티치아노, 카라바조 등 대가들의 작품이 사라졌다. 신대륙 탐험의 항로를 기록한 지도와 항해 일지도 모두 재로 변했다. 당시 인구 20만 명의 대도시는 하루아침에 폐허로 바뀌었다. 왕과 귀족들은 리스본 외곽에서 살아남았지만, 시민의 대부분은 축일 미사에 참석했다가 희생됐다.
왕 주제 1세는 이후 평생 폐소공포증에 시달렸다. 그는 도시 재건이 끝난 뒤에도 궁궐 대신 리스본 외곽 언덕에 나무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대지진의 충격은 개인의 트라우마를 넘어, 한 나라의 정체성까지 흔들었다. 종교적 신앙심이 깊었던 리스본 시민들은 이번 재앙을 '신의 심판'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수도자들이 가장 먼저 희생됐고, 오히려 죄악의 거리로 불리던 집창촌은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 전역에 퍼져있던 낙관주의 철학에 금이 갔다. 이후 신의 뜻보다 이성과 경험으로 세계를 이해하려는 근대적 사고가 이 재앙을 계기로 태어났다.
재난 직후 포르투갈 국왕 주제 1세가 급히 수도로 돌아왔지만 왕궁과 관청, 도서관은 이미 잿더미가 돼 있었다. 귀족이자 왕의 측근인 세바스티앙 지 카르발류(후일 폼발 후작)가 재난 수습에 나섰다. 카르발류는 수습 방법을 묻는 왕에게 "죽은 자를 묻고, 산 자를 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카르발류는 약탈을 막기 위해 군을 투입하고, 감염병을 방지하기 위해 시신을 신속히 수습했다. 생존자에게는 직접 식량을 나눠주며 질서를 되찾았다. 재난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던 당시 유럽에서 볼 수 없는 대응이었다. 카르발류는 이후 리스본 재건 계획을 주도해 건물 높이를 제한하고 오늘날 내진 구조에 해당되는 '가이올라(gaiola) 공법'을 도입했다.
카르발류는 1758년 도시계획법을 제정해 리스본을 완전히 새로 설계했다. 건물은 5층 이상 짓지 못하도록 제한했고, 지반 흔들림에도 버틸 수 있도록 목재 프레임을 넣은 가이올라 구조를 의무화했다. 골목은 직선으로 넓게 뚫렸고, 건물 간격을 넓혀 화재 확산을 막았다. 오늘날 리스본의 중심인 코메르시우 광장도 이때의 재건 사업에서 탄생했다.
또 전국 교구에 '지진 설문조사'를 보내 피해를 기록하게 했다. "지진은 몇 분간 지속됐는가?", "바닷물이 처음에 솟았는가, 가라앉았는가?" 등 13개 문항이었다. 이는 인류 최초의 공식적 지진 조사로, 현대 지진학 연구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리스본 대지진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서구 문명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건이었다. 당시 재건을 이끈 카르발류의 지휘 아래, 리스본은 세계 최초의 근대 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유럽 각국은 포르투갈의 복구 시스템을 참고해 국가적 재난 대응 체계를 정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