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시즌부터 KBO 리그에 도입된 자동투구판정시스템(ABS) 시대에서 사이드암과 언더핸드 유형의 잠수함 투수들은 말 그대로 '생존의 기로'에 섰다. ABS 체제에서는 좌우 코너워크보다 존의 상하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유리하지만, 팔 각도가 옆이나 아래에서 형성되는 잠수함 투수들은 공의 궤적이 주로 좌우로 흘러나가는 특성을 지닌다. 이로 인해 스트라이크 판정을 끌어내기가 유독 까다로웠고, 실제 리그 전체적으로 잠수함 선발 투수들의 입지는 급격히 좁아졌다.
모두가 어렵다는 평가를 내렸던 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 KT 위즈 '토종 에이스' 고영표(35)가 또 한 번 편견을 깨부쉈다. 끊임없는 피칭 디자인 수정과 과감한 구종 변화로 'ABS 시대 최초 10승 잠수함 선발 투수'라는 값진 이정표를 세웠다.
고영표는 20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6 신한 SOL KBO리그 LG 트윈스와의 원정 경기에 선발 등판해 6이닝 6피안타(2피홈런) 6탈삼진 3실점(101구)의 호투를 펼치며 팀의 16-4 대역전승을 이끌었다.
이로써 고영표는 KT의 창단 첫 통합우승 시즌이었던 2021년을 시작으로 2022년, 2023년, 2025년에 이어 올해까지 개인 통산 5번째 10승을 달성했다. 아울러 KT 한 팀의 유니폼만 입고 묵묵히 마운드를 지켜온 끝에 '개인 통산 1300이닝'이라는 대기록도 함께 완성했다.
사실 이날 경기 흐름은 어려웠다. 타선이 중반까지 1점에 묶여 고전했고, 고영표 역시 4회말 문보경과 오지환에게 연속 타자 홈런을 맞고 3실점하며 흔들렸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포수 한승택과의 긴밀한 소통이 반전을 만들어냈다. 경기를 마친 고영표는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홈런 두 방을 맞고 내려와 (한)승택이와 대화를 많이 나눴다. 승택이도 실투였던 것 같아 미안하다고 하더라"며 "상대 타자들의 스윙 궤적이 어퍼스윙 성향이라 높은 존을 적극 공략하기로 전략을 수정했다. 하이존에 투심을 찔러 넣고, 커브도 높게 던지며 체인지업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상하 볼배합으로 타자들을 돌려세웠다"고 설명했다.
1-3으로 뒤진 6회까지 추가 실점 없이 버텨낸 고영표의 역투는 팀 타선을 일깨웠다. 6회 투구를 마친 고영표는 유한준 타격코치가 주도한 야수 미팅에 합류해 파이팅을 불어넣었고, KT는 7회초 김민혁의 싹쓸이 적시타를 포함해 대거 6득점 빅이닝을 만들며 경기를 단숨에 뒤집었다.
고영표는 "승리 요건도 기쁘지만, 최근 이틀간 팀 안타가 도합 5개에 그칠 정도로 침체돼 있어 마음이 쓰였다"며 "7회에 타선이 폭발해 흐름을 되찾고 팀에 활기가 도는 것을 보며 정말 기뻤다"고 동료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이번 시즌 고영표의 투구에서 특히 돋보이는 부분은 이닝당 1개 꼴을 넘나드는 탈삼진 페이스다. 122⅔이닝을 던지는 동안 무려 133개의 삼진을 솎아낸 것이다. '맞혀 잡는 투수'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탈삼진 능력을 대폭 끌어올렸다.
그 배경에는 ABS의 특성에 대한 치밀한 연구가 있었다. 고영표는 "ABS 적응은 잘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하이존에 투심을 던지며 타자들을 까다롭게 만들었고, 타자들이 낮은 체인지업을 생각할 때 높은 패스트볼이 들어가니 루킹 삼진이 증가한 것 같다"며 "커브 그립도 바꿔 상하 궤적의 폭을 키운 것이 효과를 봤다"고 짚었다.
이어 "사실 어린 시절부터 변화를 시도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편이었다. 실패했던 경험들이 지금의 밑거름이 됐다"며 "ABS 역시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거대한 변화였지만, 안주하지 않고 매년 그에 맞춰 꾸준히 변화를 가져갔다"고 강조했다.
'ABS 체제에서 사이드암 선발은 살아남기 힘들다'는 세간의 인식을 보란 듯이 뒤집은 고영표는 투수로서의 남다른 긍지를 내비쳤다. 고영표는 "현재 리그에서 사이드암 선발 투수로는 사실상 혼자 마운드를 책임지고 있는데, 마음 속에 대단히 큰 자부심을 품고 있다. (2025시즌에 이어) ABS 시대에 10승을 달성했다는 점도 개인적으로도 유의미하게 다가온다"며 "앞으로도 ABS를 가장 잘 활용하는 사이드암 선발 투수로 팬들의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통산 5번째 10승과 1300이닝 달성에 대해서는 "선발 투수로서 한 시즌을 착실하게 버텨왔다는 증표인 것 같다"며 "10승에 만족하기보다 15승, 20승은 거둬야 더 도파민이 나올 것 같다. 마운드에서는 승수 욕심보다 (팀이 바라는) 최소 실점으로 6이닝을 지키겠다는 임무에 집중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