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미국 전쟁부 블랙리스트(중국군사기업·CMC)에 오른 중국 AI(인공지능) 부품업체 중지이노라이트의 홍콩 증시 IPO(기업공개)에 투자한 것과 관련, 국민 노후자산을 지정학적 리스크(위험)에 노출시킨 판단이 적절했는지 국내외에서 문제가 제기됐다.
미국 정부가 한국, 일본 등을 상대로 중국 주도 AI 협력체 참여를 막는 압박성 서한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국민연금이 CMC IPO에 투자한 의사결정 과정을 국민에게 충분히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우려도 국내외에서 제기됐다.
다만 중국 AI기업의 성장성을 감안하면 수익 기회를 확보하기 위한 투자이고, 모든 의사결정 과정을 공개하는 것은 투자 전략과 협상력 측면에서 불리할 수 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20일 연기금과 IB(투자은행)업계 등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지난 7월20일 블랙록 산하 펀드 등과 함께 총 2억5000만달러 규모의 코너스톤 투자(상장 전 물량을 확정 배정받는 투자) 계약을 맺고 중지이노라이트 홍콩 IPO에 참여했다. 미국 전쟁부가 중지이노라이트를 지난 6월 전쟁부 직접 조달 사업 참여 금지대상인 중국군사기업(CMC)에 지정한 뒤 이뤄진 투자다. 중지이노라이트는 AI 데이터센터에 쓰이는 광트랜시버(전기신호와 광신호를 서로 변환하는 장치)를 생산하는 중국 광통신 장비업체다. 국민연금이 CMC 지정 이후 기업 IPO에 투자한 것이 확인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미국이 중국과 전략 경쟁 수위를 높이는 가운데 이뤄진 투자여서 의사결정 과정을 두고 이목이 쏠렸다. 로이터가 초안을 입수했다며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미국 국무부는 'AI 공동 성명'에 지난 6월 참여한 한국, 일본 등 35개국을 상대로 "모든 곳에 속하겠다는 것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며 대중국 AI 협력에 대해 경고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2일 신임장을 제정한 미셸 스틸 주한미국대사도 미 하원 미중전략경쟁특위 위원으로 활동한 대중국 강경파로 손꼽힌다. 아울러 중지이노라이트는 미국의 대중국 견제 기조에 따라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중국산 광트랜시버 수입 제한도 검토하면서 미국발 규제를 연타로 적용받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국민연금은 중지이노라이트 상장 이후 6개월간 보호예수기간으로 인해 보유 주식을 단기 처분하는 게 불가능한 것으로 파악됐다.
국민연금은 머니투데이로부터 전쟁부 명단 등재 사실을 인지·검토했는지, 수탁자책임 활동 지침 또는 책임투자 기준상 검토 절차가 있었는지 등에 대한 질의를 받고 "개별 투자 내역에 대해 확인해줄 수 없다"고 했다.
안보 관련 학계에선 국민연금의 투자가 지정학적 위험과 관련이 있는 이슈로 본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미중 전략 경쟁은 트럼프 행정부 이후가 되더라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고, 미국이 동맹국 압박을 통해 중국과의 경제 관계를 축소시키려는 노력을 한다는 것은 이미 드러나 있다"며 스몰 야드, 하이 펜스(small yard, high fence·제한된 분야에서 강도 높은 규제) 전략 등 미국이 다양한 방식으로 중국의 팽창을 억제하는 전략을 거듭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박 교수는 "대만 위기 같은 사건으로 미중 갈등이 심각해지면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경제가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며 "국민연금은 조금 더 안전한 자산에 대한 투자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국민연금의 '개별 투자 건 확인 불가' 답변에 대해 "매우 부적절하다"며 "국민의 연금인 만큼 최대한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운용하고 다양한 층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
국민연금은 올해 국내주식 목표비중을 상향한 결정이 나온 기금운용위원회 회의록을 오는 2030년까지 비공개로 처리하는 등 비공개 행보를 확대했다. 아울러 미국 주요 공적 연금이 사모펀드별 출자약정액과 실제 납입액, 회수액뿐 아니라 순내부수익률(IRR·투자금액과 회수 시점을 반영한 수익률)과 투자배수 등을 분기마다 공개하는 것과 달리 국민연금은 출자 대상 PEF에 대한 개별 수익률도 공개하지 않는다.
국민연금의 CMC 지정 기업 IPO 투자는 해외에서도 지정학적 위험과 정보 공개 투명성을 둘러싼 논란으로 번졌다. 대만 반도체·전자산업 전문매체 디지타임스도 '한국 국민연금도 AI 광통신에 베팅…중지이노라이트 투자, 미국 규제 우려 불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과거 연기금은 기업 실적과 성장성, 기업가치, 시장위험을 주로 따졌지만 앞으로는 지정학적 위험까지 함께 고려해야 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보도했다.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비중이 전체 금융자산의 절반을 넘어선 만큼 미중 기술경쟁과 전쟁, 공급망 재편 등 전통적인 금융위험과 다른 변수가 자산배분 과정에서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미국 보수정치행동회의(CPAC) 이사인 고든 창 변호사는 X(옛 트위터)에서 "국민연금이 투자 승인 전에 CMC 지정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미국의 규제 및 국가안보 위험에 대한 공식적인 검토가 있었는지는 한국인이 최소한 알아야 할 사안"이라고 썼다. 창 변호사는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과 가까운 대중국 강경파로 분류된다.
다만 시장에선 국민연금이 투자 내역을 공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매매 방향과 투자 전략, 협상 조건 등이 외부에 미리 알려질 경우 시장에서 선행매매를 유발하거나 거래 상대방과의 협상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아울러 중국 AI기업이 자본시장에서 부상한 현상을 감안할 때 수익 확보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판단이란 분석도 존재한다.
IB업계 관계자는 "PEF, 운용사에 대해 국민연금이 요구하는 정보를 감안하면 국민연금이 국민에게 알리는 정보가 비대칭적으로 적은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시장에서의 협상력 유지나 운용 전략 보안을 감안할 때 모든 운용 정보를 국민연금이 공개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