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 갈등의 핵심 당사자인 대한의사협회(의협)와 정부가 동시에 '식물 상태'에 놓였다. 의협은 회장 탄핵 후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로 운영되고, 정부 역시 대통령 탄핵안 가결에 따라 총리 권한대행 체제로 전환됐다. 의대 증원을 포함해 의료 개혁에 대한 파열음이 점차 커지지만, 양쪽 모두 '대표 없는' 초유의 상황이 내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여 의정 갈등에 따른 의료현장의 혼란도 당분간 불가피할 전망이다.
15일 정부와 의료계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전날 찬성 204인으로 가결되면서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해 국정 수습에 나섰다. 의정 갈등을 풀어갈 행정부의 '수장'이 바뀐 것이다. 의사들을 대표하는 의협 역시 지난달 10일 임현택 전 회장이 명예 실추 등을 이유로 탄핵당하면서 비대위 체제로 전환된 지 1개월이 지났다. 현재 박형욱 위원장이 전공의, 의대생, 개원의, 대학교수 등 15명으로 구성된 비대위를 구성하고 대정부 투쟁을 이끌고 있다.
의대 증원이 촉발한 의정 갈등은 이날로 300일째 해결책을 내지 못하고 있다. 겨울 추위가 닥친 의료 현장은 호흡기·심뇌혈관 질환에 따른 응급·중증 환자의 증가와 설 연휴 '응급실 대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속속 터져 나온다. 2025학년도 의대 증원과 이에 따른 의과대학 교육, 사직 전공의 입대 등 의정 갈등 '후폭풍'에 대한 경고도 잇따르고 있다. 최안나 의협 대변인은 지난 14일 SNS(소셜미디어)에 의대 증원 문제 등을 거론하며 "윤 대통령 탄핵안 가결에도 마냥 웃을 수 없다. 의료계의 겨울은 이제 시작"이라고 위기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초유의 '수장 공백' 상황에서 의사와 정부가 의료사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은 희박한 상황이다. 양쪽 체제가 모두 과도기적 성격을 띤 만큼 의협 비대위와 총리실 모두 '안정적 권력 이양'에 힘을 실을 뿐, 의료 개혁을 심도 있게 논의하는 데는 각각 내부 반발과 일관성 있는 정책 추진 등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실제 의협 비대위는 의대 증원 등 정부 정책에 대한 문제를 짚으면서도 의정 간 대화나 의사단체 간 연대 등 적극적인 투쟁은 모색하지 않는 모습이다. 정부도 의료 개혁을 완수하겠다고는 하나 의료계와의 소통 방안 등 세부 대책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여야의정협의체, 의료개혁 특별위원회(의개특위)와 같은 의정 간 '소통 채널'은 의대 증원과 '처단 포고령'의 후폭풍으로 현재 단절됐다.
의정 혼란은 내년 초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의협은 다음 달 2~4일 회장 보궐선거를 실시하는데,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아 결선 투표까지 가면 8일에야 새 회장이 선출된다. 새로운 집행부를 꾸려 비대위로부터 권한을 이행 받고, 또 의료계에 뜻을 보아 정부에 협상안을 제시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탄핵안 가결 후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려야 하는 정부 내각은 안정화하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관측된다.
다만, 정부는 "흔들림 없이 의료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교육부의 내년도 예산안에는 전공의 수련환경 혁신지원 및 수련수당과 의대 증원에 따른 교육여건 개선에 각각 약 2700억원, 4877억원의 예산이 편성됐다. 전국 39개 의과대학은 지난 13일 3119명의 수시모집 최초 합격자 발표를 완료한 데 이어 오는 31일 정시 원서 접수를 앞두고 있다.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지원사업도 지난 5일 기준 47곳 중 44곳이 참여 의사를 밝히며 착실히 진행 중이다. 정부가 계획한 의료 개혁이 혼란 속에서도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시한폭탄' 같은 의사들의 반감을 잠재울 방안이 마땅치 않다. 복지부와 의협 모두 '협상 주체'로 나서긴 부담인 상황에서 정부가 소통 없는 의료 개혁을 무리하게 추진했다간 의사들의 더 큰 반발을 부를 가능성이 있다. 차기 의협 후보와 의대교수 등 의사들은 '처단 포고령'에 이어 윤 대통령 탄핵안 가결로 의대 증원의 '원점 재검토'를 재차 촉구하는 등 투쟁 수위를 한층 끌어올리는 상황이다.
신응진 순천향대 중앙의료원 특임원장은 "정부가 마비 상태인 만큼 의료 개혁도 일단 보류할 수밖에는 없다"며 "의사 없는 의개특위가 의료개혁안을 내도 현장을 모르는 탁상공론이란 반발에 부닥칠 것이다. 향후 새로운 거버넌스를 구성하고 다시 논의해야 의협 등 의사단체도 들어올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