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저녁 뉴욕 맨해튼의 JP모간 글로벌 본사 51층 대강당. '월가의 황제'로 불리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간 회장이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JP모간 자산관리 부문의 메리 캘러핸 최고경영자(CEO)와 그윈 숏웰 스페이스X 사장이 나란히 앉은 무대 뒤 대형 스크린에는 화상으로 연결된 일론 머스크의 얼굴이 떴다.
역사상 최대 규모인 1조7500억달러(한화 약 2670조 원)의 몸값을 내건 스페이스X의 뉴욕증시 IPO(기업공개) 투자설명회 현장이었다. 이날 행사는 미국 전역 26개 주, 90여개 핵심 자산관리 지점의 전용 스크린으로 생중계돼 3500명이 넘는 초고액 자산가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됐다. 다이먼 회장은 "머스크는 우리 시대의 토마스 에디슨"이라며 스페이스X 공모주 투자를 독려하는 전례 없는 전국 단위의 공격적 판촉을 진두지휘했다.
미국 최대 투자은행(IB)의 수장이 직접 나선 이례적 장면에 월가 금융맨들이 느낀 묘한 이질감은 다이먼 회장과 머스크 사이에 쌓였던 적잖은 앙금 때문이다. JP모간은 2021년 머스크의 '테슬라 상장폐지 트위터' 사건과 관련해 1억5000만 달러 규모의 거액 소송을 제기했다. 머스크 역시 맞소송으로 받아치면서 공개적으로 충돌했다. 양측이 2024년 말 법정 공방을 마무리한 뒤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이먼 회장이 머스크의 '1등 상장 세일즈맨'을 자처하고 나선 셈이다.
자존심과 법정 공방으로 얼룩졌던 관계마저 접어둔 이 장면은 현재 뉴욕 금융시장과 머스크의 테크 제국 사이에서 권력의 무게추가 어디로 기울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화려한 흥행 전야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번 스페이스X IPO에서 머스크가 주관사단에 제시한 수수료 조건은 월가의 오랜 가격결정 관행에 도전한 수준이었다. 월가 소식통에 따르면 머스크는 주관사단에 지급할 수수료율을 '0.75% 미만'으로 제한했다. 인센티브 성과급까지 더해도 전체 수수료가 0.75%를 넘지 못하도록 눌러놓은 것이다.
월가에선 그동안 아무리 대형 딜이라고 해도 최소 1~ 2% 수수료율을 보장받는 것이 관행이었다. 주관사단이 수백명의 IB 인력과 변호사, 회계사를 수개월 동안 투입해 기업 실사를 진행하고 상장 당일 미매각 물량을 자기 자금으로 떠안아야 하는 총액인수 위험수당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인건비와 고도의 자원 투입에 따른 기회비용을 감안할 때 수수료율이 1% 밑으로 떨어지면 사실상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상식이었다.
머스크는 이런 불문율에도 뉴욕증시 상장 역사상 가장 '짠물 수수료'를 관철시켰다. 월가 한 관계자는 "하반기 상장을 대기 중인 오픈AI, 앤트로픽 등 다른 AI 기업들도 수수료 후려치기에 나설 명분을 얻은 셈"이라고 말했다. 시장에선 공모가격 결정 과정에서 머스크의 영향력이 과거 어느 기업 IPO 때보다 컸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도 JP모간을 비롯해 골드만삭스, 모간스탠리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대형 IB가 '을(乙)'을 자처하며 줄을 선 이유는 일단 절대 액수의 유혹이다. 수수료율은 0.75% 미만으로 처참하지만 전체 공모 규모가 750억달러(한화 약 114조원)에 달하는 초대형 딜이다 보니 주관사단 전체가 챙기는 수수료 총액이 5억달러(약 7500억원)에 달한다. 비율은 낮아도 판돈이 워낙 커서 당장 실적 굶주림에 시달리는 월가 IB로선 외면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2019년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의 자국 내 상장 당시에도 월가는 0.25%라는 극단적인 짠물 수수료를 감내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아람코는 사우디 왕실의 국유화 자산이었기 때문에 상장 이후 월가 IB들이 추가로 노릴 게 없는 '일회성 잔치'에 그쳤다. 스페이스X는 다르다. 이번 IPO 주관을 따내야 향후 테슬라의 대규모 유상증자, xAI의 추가 펀딩, 스타링크 인적분할 및 상장 같은 예약된 딜에서 배제되지 않을 수 있다. 이번 딜에서 눈밖에 나면 머스크 제국의 미래 생태계에서 영원히 퇴출당할 수 있다는 공포가 월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스페이스X IPO는 초유의 우주·인공지능(AI) 인프라 기업의 증시 입성을 두고 월가의 전통적인 금융권력 역학구도가 뒤집혔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지난 9일 마감된 스페이스X 공모 청약에서는 목표액의 4배가 넘는 2500억달러(약 380조원)의 수요가 몰렸다. 미국 증시 사상 최고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