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가 대한민국에 반세기 동안 금지했던 자국 내 우라늄 농축을 사우디아라비아에는 허용하면서 '이중잣대'를 드러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국을 비롯한 주요 동맹국들의 핵 협정 요구가 확산될 전망이다.
23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는 "한국은 수십 년간 미국의 핵 확산 저지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보여준 나라였다"고 짚으며 "트럼프 행정부는 그 기준을 산산조각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날 사우디아라비아에 자국 내 우라늄 농축을 조건부로 허용하는 내용을 담은 원자력 협력협정을 체결했다. 미 원자력법 123조에 바탕을 둬 '123 협정'으로도 불린다. NYT는 해당 조치가 한국에 "사우디는 되고 왜 우리는 안되냐"는 의문을 띄웠다며 동맹 간 균열이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번 협정이 원자력 개발을 위해서라고 밝혔지만, 한국에는 이미 원자로 26기가 가동 중이다. 한국수력원자력에 따르면 국내 원자력 설비 용량은 2만 6050메가와트(MW)로 세계 5위 규모다. 한국은 1972년 미국 동의 없이는 우라늄 농축을 금지하는 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원자력 개발에 필요한 모든 우라늄 원료를 수입해서 해결한다. 에너지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독자적인 우라늄 농축은 오랜 외교 과제였다.
그런 한국을 뒤로하고 아직 원전이 하나도 없는 사우디에 원자력 개발을 이유로 우라늄 농축 길을 터준 건 모순이라는 지적이다.
게다가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대신 별도의 양자 안전보장조치 협정을 맺은 점도 특혜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이란이 핵무기를 만들 경우 자국도 핵무기를 만들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반면 이재명 대통령은 핵무기를 추구하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하면서 중동과 달리 "한반도에서의 대규모 전쟁은 수십 년간 억제돼 왔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 계획을 승인하면서 우라늄 연료 확보에 미국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국내에서 농축 또는 재처리 시설을 운영할 수 있는지 등 세부 사항은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실무 협상은 쿠팡 관련 갈등처럼 외교현안이 불거지면서 중단됐다가 지난달에야 재개됐다.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중동 국가에서도 핵 협력에 대한 요구가 빗발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은 타국에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를 금지하는 이른바 '골든 스탠더드'를 갖고 있지만 사우디에 이를 면제한다. 앞서 미국과 유일하게 123협정을 맺었던 아랍에미리트(UAE)의 사례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핵 농축은 실수'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이 합의는 우라늄 농축 및 플루토늄 재처리를 금지하는 '핵심 비확산 원칙'에서 벗어났다"며 터키, 이집트, UAE 등 중동 지역에서 같은 수준의 핵 협력 요구가 터져나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번 협정이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스라엘과 수교를 맺는 '아브라함 협정'에 동의하는 걸 조건으로 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사우디는 입장을 밝히지 않은 상태다. 레이프 에릭 이슬리 이화여대 국제학과 교수는 NYT에 "트럼프 행정부가 국제 규범보다 지정학적 거래를 우선시하고 있음이 명확해졌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