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거울을 지구 궤도에 띄운다. 인간의 뇌와 컴퓨터를 연결한다…. 이처럼 대담한 발상을 흔히 '문샷 아이디어'라고 한다. 이 같은 생각을 구현하는 혁신적인 과학·공학 기술을 '딥테크'라고 할 수 있다. 획기적 기술을 개발하는 딥테크 스타트업에 위험을 감수하고 베팅하는 '문샷 투자'가 늘고 있다. 변화하는 투자 흐름의 중심엔 인공지능(AI)이 있다.
10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AI가 벤처캐피털(VC)의 투자 공식을 다시 쓰고 있다며 "한때 터무니없다고 여겨진 아이디어들이 VC의 관심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2024년 이후 '딥테크'에 대한 전 세계 투자액은 AI 분야를 제외하더라도 1500억달러(약 202조원)를 넘어섰다. 이는 2019년 말 기준, 그때까지 10년간 딥테크 투자액인 1300억달러를 웃도는 규모다.
특히 최근에는 하드웨어 기반 스타트업이 벤처 투자자들의 관심을 받는 흐름이다. 2000년대 이후 소프트웨어 업체에 투자금이 몰린 것과는 상반된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스타트업 '사이언스'의 맥스 호닥 공동 창업자는 "한동안 하드웨어 분야는 투자자들의 관심에서 밀려났으며, 그것은 건전한 현상이 아니었다"며 "이제 우리는 다시 돌아왔다"고 말했다.
AI가 기술 창업의 환경을 바꾸면서 '문샷' 투자에 불을 지피고 있다고 FT는 진단했다. 특히 AI 시뮬레이션이 우주 기술이나 핵융합 등 분야에서 실험 비용을 크게 낮춘 점에 주목했다. 막대한 초기 투자 부담이 줄면서 투자자들이 하드웨어 벤처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됐다. 복잡한 기술이 접목된 제품이라도 AI를 활용하면 제품 전체를 하루 안에도 다시 만들 수 있다.
영국 VC '플루럴'의 카리나 나미는 "실제 물리적 세계에서 무언가 하기 전에 컴퓨터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완전히 바뀌었다"며 "수익을 거두기 위해 필요한 자본의 규모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이른바 'SaaS 대재앙(사스포칼립스)'도 투자자들이 하드웨어 기업에 시선을 돌린 이유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올 초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주가가 폭락하면서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만 약 1조6000억달러의 시가총액이 증발했다고 보도했다. AI 모델이 전통적인 소프트웨어의 기능을 대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SaaS 대재앙을 지켜본 투자자들에게는 모험적인 하드웨어 기술 스타트업도 "그다지 두려운 투자처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고 FT는 전했다.
우주에서 전력을 생산하는 스타트업이 그 사례 중 하나다. 구체적으로 우주에서 태양광 에너지를 모아 지구로 송전하는 방식이 거론된다. 이 방식을 활용하면 구름 가득한 흐린 날씨나 저녁 시간대에도 태양광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
오버뷰 에너지, 리플렉트 오비탈 등 우주 스타트업은 태양 궤도에 거대한 거울을 띄워 햇빛을 반사해 지구로 보내는 송전 방식을 고안 중이다. 태양광을 모아 레이저나 마이크로파 형태의 '전력 빔'을 만들어 지구로 쏘는 방식도 있다. '스타 캐처'는 지난 5월 VC로부터 6500만달러(약 875억원)의 투자금을 조달받아 '광학 전력 빔'을 활용한 우주 전력망 구축에 나섰다.
아우렐리아 연구소에서 우주 부문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에크블로우 박사는 "로켓 발사 비용이 낮아지면서 우주에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등 새로운 산업 분야가 열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FT는 다만 이런 '문샷' 아이디어는 투자자를 설득할 만한 정량적인 밸류에이션 지표가 없다고 짚었다. 투자자들이 어떤 스타트업이 '제2의 스페이스X'가 될지 가늠할 유일한 방법은 일단 투자해보는 것뿐이라고 덧붙였다.
매체는 스타트업으로 시작한 우주항공 기업 스페이스X의 상장 사례가 "그 첫 물결에 투자하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포모(FOMO)를 부추겼다고 진단했다. 포모는 나만 뒤처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스페이스X 상장 이후 초기 투자자들은 막대한 자금을 회수했다. 일례로 미국의 밴처 캐피털 '파운더즈 펀드'는 스페이스X에 6억달러(약 8000억원)을 투자해 상장 시점 500억달러(약 67조3200억원)의 지분 가치를 확보했다고 알려졌다.
에크블로우 박사는 포모 현상이 "우주 분야 스타트업의 '캄브리아기 대폭발'을 야기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캄브리아기 당시 수많은 동물들이 생겨났던 것처럼 우주 분야 스타트업도 짧은 기간에 우후죽순 생겨날 수 있다는 진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