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무역 체제가 소수의 지정학적 블록이나 다수의 지역 그룹으로 쪼개질 경우 20년 뒤 세계 경제 활동이 크게 위축될 것이라고 세계무역기구(WTO)가 경고했다.
15일(현지시간) WTO의 '세계무역보고서 2026'는 다자 규범인 WTO 체제가 완전히 소멸하는 경우부터 다자주의를 지키는 시나리오까지 크게 세 가지 경로를 제시했다.
첫째 WTO 체제가 사실상 끝나고 개별 국가 간 양자 자유무역협정(FTA)만으로 세계 무역이 운영되는 경우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꼽힌다. 2050년 전 세계 수출이 26.9% 줄고 국내총생산(GDP)은 6.9% 쪼그라들 것으로 분석됐다. 전체 무역 규모의 4분의 1 이상이 사라진다는 전망이다. WTO는 그 원인으로 '교섭력 불균형'을 꼽았다.
다자체제에서는 거대 경제권이 확보한 유리한 조건이 소규모 국가에도 함께 적용되지만 개별 FTA 체제에서는 협상력이 약한 소규모·개발도상국이 거대국과의 일대일 협상에서 일방적인 양보를 강요받게 된다는 것이다. 시장 규모가 작고 전략적 가치가 낮은 최빈국들은 아예 주요국의 FTA 대상에서 배제돼 글로벌 무역에서 고립될 위험도 있다.
둘째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지정학적 블록이 양분되는 경우다. 이러면 2050년까지 전 세계 수출이 18.6%, GDP는 5.1% 감소할 것으로 WTO 경제학자들은 전망했다. 각 블록 내에서 제한적 교역이 고착되면 지금처럼 전지구적인 무역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셋째 다자협력이 강화되면 세계 GDP는 2.9% 늘고, 수출은 17.9% 늘어날 수 있다. WTO는 상호주의, 비차별성, 구속력 있는 규범이라는 다자주의의 기본 원칙을 지키되, 변화한 현실에 맞게 제도를 현대화하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디지털 무역, 인공지능(AI), 탄소국경세 등에 대한 새로운 규범을 마련하고, 복수국 간 협정 등 유연한 접근법을 적극 도입해야 한다고 WTO는 제언했다.
WTO는 현재의 무역 체제가 "80년 역사상 가장 심각한 제도적 마비와 균열이 진행 중인 중대한 기로"에 있다고 진단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약 80%에 달했던 최혜국대우(비차별 관세) 기반 교역 비중은 올해 초 약 72%까지 떨어졌다. 보호무역 관세와 양자 특혜 협정, 무역구제 조치가 쏟아지면서 다자 규범의 근간인 비차별 원칙이 빠르게 잠식당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각국의 산업 보조금 경쟁과 정부 개입도 통상 갈등을 부채질하고 있다. 주요국들이 반도체·배터리·친환경 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쏟아붓고 있지만, 2015~2024년 기준 WTO 보조금 통보 의무를 지킨 회원국은 59%에 그쳤다. 정책 예측 가능성이 흔들리면서 무역정책 불확실성(TPU) 지수도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WTO는 보고서에서 "현상 유지는 선택지가 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로버트 스테이거 WTO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회원국들이 마주한 선택지는 '개혁이냐 현상 유지냐'가 아니다"라며 "현재의 경제 현실에 맞춰 규칙 기반 협력을 진화시키느냐 아니면 예측 불가능한 '힘의 논리'로 표류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