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네덜란드·스웨덴의 해법…어떻게 연금을 정치에서 떼어냈나

김하늬 기자
입력 2026.11.08 06:00 수정 2026.11.08 06:00

[선데이 모닝 인사이트]유럽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청구서…연금이 국가 예산을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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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펜하겐 로이터=뉴스1) 김범수 기자 = 4일(현지시간)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 의회 청사 앞에서 교육 예산 삭감에 항의하는 고등학생·대학생들의 시위가 열렸다. 덴마크 정부는 국방비 증액을 위해 모든 18세 이상 학생들에게 주던 복지수당 예산을 삭감했다. 2026.11.4 ⓒ 로이터=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사진=(코펜하겐 로이터=뉴스1) 김범수 기자

덴마크·네덜란드·스웨덴의 연금 모델은 단순한 '적립식 성공담'이 아니다. 이들 국가는 기초보장 위에 직역·개인 적립축을 얹고, 기대수명 연동과 자동균형장치를 통해 연금 지출이 매번 정치 협상의 대상이 되는 구조를 줄였다. 그러나 이 모델은 수십 년에 걸친 자산 축적, 긴 노동생애, 상대적으로 건전한 재정을 전제로 한다. 이미 고령화가 진행됐고 국가채무 부담도 큰 프랑스·이탈리아 같은 대륙형 복지국가가 단기간에 복제하기에는 전환 비용이 너무 크다.

◇3국은 어떻게 충격을 분산했나

덴마크는 국가가 지급하는 기초연금 위에 단체협약에 따른 준의무 직역연금을 얹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한눈에 보는 연금 2023' 덴마크 편에 따르면 직역연금 보험료는 임금의 10~18% 수준이다. 유럽 금융소비자연맹(Better Finance)은 2023년 연금 보고서에서 생산직이 대체로 12%, 사무직이 15~18%를 부담한다고 집계했다. 덴마크 중앙은행이 지난 3월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연금회사 총자산은 지난해 말 4조5840억크로네, 약 6100억유로에 이른다. 공적연금 수급개시연령은 기대수명에 연동돼 2040년 70세가 되며, 1971년생부터 적용된다.

네덜란드는 기초연금(AOW)에 준의무 직역연금을 더해, OECD가 지난해 11월 낸 '한눈에 보는 연금 2025' 기준 평균소득자 순소득대체율이 96%에 이르는 최상위권 국가다. 동시에 확정급여(DB)형 직역연금을 집단 확정기여(DC)형으로 바꾸는 대전환을 진행 중이다. 연금기금이 장래 급여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약속하던 구조에서, 운용수익과 세대별 위험을 개인 몫에 더 직접 반영하는 구조로 옮겨가는 작업이다.

스웨덴은 부과방식을 폐기하지 않았다. 보험료를 개인 명목계좌에 쌓는 명목확정기여(NDC) 소득연금에 자동균형장치를 붙였다. 연금 부채가 자산을 넘으면 급여 인상폭이 자동으로 낮아진다. 임금의 2.5%는 적립식 프리미엄연금 개인계좌로 돌린다. 스웨덴 사례는 적립식 전환 그 자체보다, 보험료율과 급여 산식, 자동조정 규칙을 정치가 임의로 바꾸기 어렵게 만든 제도 설계가 핵심임을 보여준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 헨더슨연구소가 올해 1월 낸 보고서 '구대륙, 새 성장: 유럽 경제의 엔진으로서의 연금개혁'에 따르면 덴마크·네덜란드·스웨덴은 2024년 기준 유럽연합(EU) 국내총생산(GDP)의 12%에 불과하지만, 공적·직역·개인연금을 모두 합친 EU 연금자산의 60%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세 나라의 공통점은 적립 규모 그 자체보다 조정의 자동화다. OECD는 같은 '한눈에 보는 연금 2025'에서 GDP 대비 공적연금 지출이 2023~24년부터 2050년까지 덴마크는 8.7%에서 7.8%로, 스웨덴은 8.0%에서 7.0%로 낮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연금 지출을 정치권이 매번 새로 흥정하지 않도록 만든 설계가 그 바탕이다.

사진=BCG그룹 핸더슨 연구소 시각물을 AI로 한글 번역

◇대가와 한계: 대륙형은 왜 못 따라 하나

이 모델에도 대가는 있다. 덴마크의 70세 수급연령에 노동계는 "존엄한 노후를 잃는다"며 반발했다. 적립연금은 금융시장 위험에도 노출된다. 고령층이 은퇴 직전 시장 충격을 맞을 경우 급여 안정성 논란은 다시 정치 문제로 돌아온다.

스웨덴도 같은 방향이지만 속도는 덴마크보다 느리다. 스웨덴은 올해 1월 연금 수급 시점의 기준이 되는 '기준연령' 제도를 도입했다. 기준연령은 2031년까지 67세로 정해졌고, 이후에는 기대수명에 따라 오른다. 스웨덴 연금청 전망으로는 1967~1981년생이 68세, 1982~1997년생이 69세, 1998년생부터는 70세가 된다. 덴마크의 수급개시연령이 먼저 70세에 도달하는 것은 연동 방식이 더 빠르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덴마크는 2006년 복지합의 이후 기대수명이 늘어난 만큼 수급개시연령을 5년마다 조정해왔다. 반면 스웨덴은 기대수명 증가분의 3분의 2만 기준연령에 반영한다.

네덜란드의 전환은 금융시장 변수로도 이어지고 있다. 네덜란드 금융그룹 ING가 지난 6월 25일 낸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약 6000억유로 규모의 연금기금이 확정급여형에서 집단 확정기여형으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유로 스왑 10년물과 30년물 금리차가 10~20bp(1bp=0.01%포인트) 더 벌어졌다. 2027년 1월 1일에는 최대 연기금인 공무원연금 ABP를 포함해 9000억유로 이상의 연금자산이 새 제도로 옮겨갈 예정이다. ABP가 공시한 금리 헤지 비율은 청년층 10%, 은퇴자 75%로 앞서 전환한 기금들보다 낮다. 장기 국채와 스왑 수요가 그만큼 줄 수 있다는 뜻이다.

더 근본적인 한계는 시간이다. 브뤼셀 싱크탱크 브뤼겔은 지난달 8일 보고서에서 3국의 연금자산이 유리한 인구·경제 여건과 강한 노사 제도 속에서 수십 년간 축적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다른 EU 국가들은 덴마크·네덜란드·스웨덴이 거친 역사적 전환을 재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OECD '한눈에 보는 연금 2025'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연금자산은 덴마크가 GDP의 206.4%에 이른 반면, 프랑스는 12.9%에 그쳤다.

장부의 반대편에는 쌓지 않은 부채가 있다. 브뤼겔은 대륙형 국가가 이미 약속한 연금 가운데 적립금 없이 미래 보험료와 세금으로 갚아야 하는 몫이 흔히 GDP의 4배를 넘는다고 추산했다. 지금 적립식으로 옮기면 현역 세대는 기존 은퇴자의 연금을 부과방식으로 계속 부담하면서 자기 계좌도 새로 채워야 한다. 한 세대가 두 제도의 비용을 동시에 떠안는 이중 부담이다.

브뤼겔이 제안한 해법은 '킥스타트'다. 재정이 건전한 나라에 한해 GDP의 20~25%에 달하는 국채를 발행해 국민의 개인 연금계좌에 초기 적립금을 넣어주자는 구상이다. 빚이 이미 GDP를 넘어선 프랑스·이탈리아에는 애초에 현실성이 낮은 선택지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달 13일 낸 세계경제전망(WEO)에서 올해 일반정부 총부채가 프랑스는 GDP의 118.5%, 이탈리아는 137.9%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BCG도 같은 1월 보고서에서 빚을 내 국가 연금기금을 만드는 방안은 독일만, 스페인은 제한적으로만 감당할 수 있다고 봤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투자 수익이 추가 부채 비용을 감당하지 못할 위험이 너무 크다"는 분석이다.

결국 남는 것은 자동장치다. 그러나 같은 장치도 정치 설계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스웨덴 장치가 버틴 비결은 정치적 잠금장치에 있다. 1994년 개혁은 의석 80%를 가진 5개 정당이 함께 만들었고, 이들은 '연금그룹'을 구성해 제도를 바꾸려면 참여 정당 전원이 동의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소득연금은 보험료율을 고정한 채 정부 예산 밖에서 자산과 부채의 균형을 맞추는 닫힌 구조다.

2008년 금융위기로 연금 인상폭을 낮추는 '브레이크'가 처음 걸렸을 때도 연금그룹은 삭감 충격을 3년 평균으로 나누는 조정만 했을 뿐 장치 자체는 유지했다. 2025년 8월에는 흑자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수급자에게 나눠주는 '가속 페달'에도 합의했고, 올해 의회가 이를 법제화했다. 자산이 부채의 1.15배를 넘으면 흑자 일부를 나눠주는 방식이다. 감액과 증액의 조건을 모두 사전에 정한 것이다. 다만 자동장치도 정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미국 보스턴칼리지 은퇴연구센터는 2009년 12월 낸 보고서에서 당시 손질을 두고 자동조정 장치도 이를 상쇄하려는 정치적 고려를 낳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독일 지속가능성계수는 같은 계열의 장치였지만 정치적 보호막이 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반 법률의 연금 인상 공식에 포함된 조항이었기 때문에 연정이 바뀔 때마다 협상 테이블에 올랐다. 2004년 도입 때부터 이 계수 때문에 연금이 줄어들지는 않게 하는 보호조항이 붙었고, 금융위기 때인 2009년에는 어떤 경우에도 연금이 삭감되지 않는 '연금 보장'으로 확대됐다. 2013년 대연정 협상에서는 사민당이 노조원 숙련공을 겨냥한 '63세 연금'을, 기민·기사당이 고령 여성을 겨냥한 어머니연금을 맞바꿨다. 슈피겔은 2013년 11월 이를 '시니어 대연정'이라 불렀다. 2018년에는 평균소득 대비 연금수준을 48% 밑으로 떨어뜨리지 않는 하한선이 도입되면서 계수는 사실상 힘을 잃었다. 지난해 12월 통과된 연금패키지는 이 하한선을 2031년까지 연장하고, 내년 1월 시행되는 어머니연금 III까지 얹었다. 스웨덴은 장치를 표결 밖에 뒀고, 독일은 장치를 연정 협상의 거래 대상으로 남겼다.

재정 여력이 있는 독일도 적립축 확대는 초기 단계다. 노후보장위원회가 권고하고 정부가 추진하는 소득의 2% 의무 적립축은 2028년부터 단계적으로 도입돼, 2031년에는 연 350억유로, GDP의 0.8% 규모가 될 전망이다. 브뤼겔은 지난달 8일 낸 별도 논평에서 덴마크·네덜란드의 보험료율 10~18%에 비하면 출발선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유럽 연금개혁의 교훈은 분명하다. 적립방식이냐 부과방식이냐보다 중요한 것은 보험료율, 수급연령, 급여 산식의 조정이 매번 정치 협상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얼마나 견고한 자동조정 장치와 합의 구조를 설계하느냐다. 연금은 돈의 문제가 되기 전에 거버넌스의 문제다. 그리고 거버넌스가 실패하면 그 비용은 결국 예산과 국채시장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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