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모닝 인사이트]유럽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청구서…연금이 국가 예산을 삼킨다
![[프랑크푸르트=AP/뉴시스] 지난달 31일(현지 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배트맨 복장을 한 사람이 시위 진압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이날 '젠제트레겔트'(Z세대가 해결한다)라는 청년 단체가 '우리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렸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적인 집회를 열었다. 2026.11.01. /사진=민경찬](https://thumb.mt.co.kr/cdn-cgi/image/f=avif/21/2026/11/2026110613231767245_1.jpg)
유럽의 연금 위기는 미래의 인구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재정 문제가 됐다. 은퇴자는 늘고 보험료를 낼 현역 세대는 줄어드는 동안, 고금리는 정부가 부족분을 국채로 메우는 비용까지 끌어올렸다. 현역 세대와 국고가 은퇴 세대의 연금을 떠받치는 유럽의 부과방식 연금은 이제 복지제도를 넘어 예산, 국채시장, 정권 안정성을 흔드는 변수로 바뀌었다.
프랑스 상원은 오는 9일부터 2027년 사회보장재정법안을 정부 원안대로 심의한다. 하원이 지난달 23일 수입 부문을 부결하면서 법안 전체가 부결됐고, 연금 조항은 하원에서 다뤄지지도 못했다. 헌법이 정한 의회 심의 시한(50일)은 이달 26일 끝난다. 쟁점은 연금이다. 정부안은 월 1260유로 이하의 소액 연금에 대해서는 물가상승분을 온전히 반영하고, 그 이상 연금은 인상폭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았다.
프랑스는 이미 한 차례 정치적 후퇴를 경험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2023년 3월 법정 은퇴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올리는 개혁을 헌법 49조3항을 통해 하원 표결 없이 통과시켰다. 그 대가는 수개월간 이어진 거리 시위였다. 이후 '2026년 사회보장재정법'은 이 상향을 2028년 1월까지 유예했다. 그 결과 프랑스 연금자문위원회(COR)에 따르면 64세 은퇴는 당초 1968년생이 아니라 1969년생부터 적용된다. 연금 부담은 세대 갈등으로도 번지고 있다.
![[파리=AP/뉴시스] 5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임금 인상과 교육 예산 증액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기념비에 올라가 프랑스 국기를 흔들고 있다. 2026.11.06. /사진=민경찬](https://thumb.mt.co.kr/cdn-cgi/image/f=avif/21/2026/11/2026110613231767245_2.jpg)
독일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정부 노후보장위원회는 지난 6월 은퇴연령의 기대수명 연동과, 45년 가입자의 무감액 조기연금인 이른바 '63세 연금'의 폐지를 권고했다. 기독민주당·기사당(CDU/CSU)과 사회민주당(SPD) 연정은 7월 초 권고안을 포괄적으로 이행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지만, 8월 들어 '63세 연금' 폐지를 둘러싼 내부 이견이 공개적으로 불거졌다. 독일 공영방송 ZDF가 지난달 20~22일 실시한 폴리트바로미터 조사에서 '63세 연금' 폐지 반대는 74%, 찬성은 21%였다.
정치 일정도 꼬였다. 법안을 맡았던 배르벨 바스 노동장관은 지난달 12일 사임했다. 정부안은 그때까지 확정되지 못했다. 후임인 알렉산더 슈바이처 장관은 '63세 연금' 폐지에 반대해온 인물이다. 개혁안의 열쇠를 반대론자가 쥐게 된 셈이다. 슈바이처 장관은 취임 직후 '63세 연금'을 두고 타협안을 찾겠다고 했고, 기민·기사당 원내에서도 제도는 남기되 요건을 바꾸는 절충안이 거론된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연내 개혁안 처리를 공언했지만, 연방의회와 분데스라트 심의는 2027년 1분기로 넘어갈 가능성이 커졌다.
[선데이 모닝 인사이트]에서는 프랑스·독일을 뒤흔드는 연금 갈등의 뿌리를 따라가 유럽 부과방식 연금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지금 국가 재정과 정권을 흔드는 청구서가 됐는지, 덴마크·네덜란드·스웨덴은 그 충격을 어떻게 비껴갔는지를 짚어봤다.
◇독소조항은 제도 안에 박혀 있다
프랑스와 독일의 연금 논쟁이 반복적으로 폭발하는 이유는 단순한 재원 부족이 아니다. 제도 내부에 되돌리기 어려운 정치적 약속이 층층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공무원연금은 마지막 6개월 기본급의 최대 75%를 지급한다. 생애 평균소득이 아니라 경력 말기 보수가 기준이다. 연금제도는 직역별로 42개에 이른다. 이를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는 번번이 좌절됐다. 1995년 알랭 쥐페 총리는 대규모 파업에 밀려 개혁안을 철회했다. 마크롱 정부가 2019년 추진한 보편적 포인트제는 2020년 코로나19 사태로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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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지형은 더 나쁘다. 2027년 프랑스 대선 1차 투표는 4월로 예정돼 있다. 가브리엘 아탈 전 총리는 64세 상향 재개를 내걸었고, 국민연합(RN)은 62세 복귀를 공약하고 있다. 다만 RN 내부에서도 마린 르펜 의원과 조르당 바르델라 대표 사이에 온도차가 있다. 연금은 2027년 프랑스 대선에서 복지 공약이 아니라 국가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가르는 핵심 쟁점으로 이동했다.
독일의 독소조항은 2014년 도입된 '63세 연금'과 어머니연금이다. '63세 연금'은 45년 가입자가 감액 없이 일찍 받는 제도다. 수급 연령이 단계적으로 올라 지금은 64세 6개월이지만 이름은 그대로 남았다. 자녀 양육 기간을 연금 가입 기간으로 인정하는 어머니연금 I(2014년)·II(2019년)에는 연간 135억유로가 투입된다. 특례는 줄지 않고 늘었다. 지난해 12월 통과된 연금패키지는 내년 1월부터 어머니연금 III를 추가했다. 연간 약 50억유로가 더 든다. 여기에 법정연금 소득대체율 하한선 48%가 2031년까지 연장됐다. 2004년 도입된 지속가능성계수는 노년부양비가 오르면 연금 인상폭을 자동으로 낮추는 장치다. 그러나 48% 하한선은 이 자동장치의 작동 여지를 사실상 봉인했다.
다른 나라들도 같은 구조적 덫에 걸려 있다. 이탈리아는 1973~1992년 자녀가 있는 여성 공무원이 14년 6개월만 일해도 연금을 받을 수 있게 했던 '베이비 연금'의 비용을 아직 치르고 있다. 이탈리아 사회보장공단(INPS)에 따르면 누적 수급자는 약 25만6000명, 지금도 18만5000건에 연간 29억유로가 지급된다. 스페인은 2021년 기대수명이 늘면 신규 연금을 자동으로 줄이도록 설계된 지속가능성계수를 시행도 하기 전에 폐지하고, 보험료를 더 걷는 '세대 간 형평 메커니즘(MEI)'으로 대체했다.
영국의 '트리플락'은 연금을 물가 상승률, 임금 상승률, 2.5%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로 올린다. 물가가 튀면 물가를 따라가고, 임금이 더 빠르게 오르면 임금을 따라가며, 둘 다 낮아도 최소 2.5%는 오른다. 그러나 반대 방향의 조정은 없다. 물가와 임금이 다시 안정돼도 전년에 오른 연금액은 삭감되지 않고 다음 해 인상의 출발점이 된다. 그 결과 일시적인 인플레이션이나 임금 급등은 단년도 비용으로 끝나지 않고, 이후 모든 해의 연금 지출을 높이는 영구적 기준선이 된다. 한 번 올라간 톱니가 물러나지 않는다는 뜻에서 '래칫 효과'라 부른다.
◇비스마르크는 적립방식이었다
유럽 연금의 뿌리는 두 갈래다. 하나는 1889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 독일 재상이 만든 보험료·소득비례형이다. 다른 하나는 1942년 영국 베버리지 보고서가 제시한 정액·기초보장형이다.
비스마르크 연금은 원래 적립방식이었다. 독일이 현역의 보험료로 은퇴자의 급여를 지급하는 부과방식으로 넘어간 것은 1957년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개혁 때다. 두 차례 세계대전과 초인플레이션으로 적립금이 사라진 뒤였다. 전후 고성장과 베이비붐은 이 전환을 가능하게 했다. 노동인구가 늘고 임금이 오르는 동안 부과방식은 복지국가의 가장 효율적인 재정 기술처럼 보였다.
오늘날 유럽의 공적연금 체계는 세 갈래로 나뉜다.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그리스는 고급여·고부담형 부과방식 국가다. 현역 세대가 낸 보험료로 은퇴 세대의 연금을 지급하는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급여 수준은 높다. OECD의 '한눈에 보는 연금 2025' 자료에 따르면 평균소득자의 순소득대체율은 프랑스 70%, 이탈리아 79%, 스페인 86%, 그리스 89%로 OECD 평균 63%를 웃돈다. 보험료율도 프랑스 27%, 이탈리아 33%에 달한다. 문제는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될수록 이 구조가 더 많은 보험료와 재정 투입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덴마크·네덜란드·스웨덴은 기초연금 위에 직역·개인 적립축을 얹고, 기대수명과 임금 등에 따라 급여나 수급연령이 자동 조정되는 장치를 붙였다. 정치적 결정보다 제도 내 규칙으로 재정 부담을 분산하는 방식이다.
독일과 영국은 그 중간에 있다. 독일은 부과방식 공적연금을 유지하되 지속가능성계수를 통해 인구구조 변화를 급여 산식에 반영한다. 영국은 낮은 정액 국가연금을 기본으로 두고, 2012년 직장연금 자동가입제를 도입해 사적연금의 가입률을 끌어올렸다. 두 나라 모두 공적연금만으로 노후소득을 보장하기보다, 제도 조정과 사적 축 보강을 통해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는 절충형 모델이다.
◇'연금 고갈'은 국고 적자로 온다

부과방식 국가에서는 한국 국민연금처럼 수십 년 치 급여를 쌓아둔 대규모 적립금이 일반적이지 않다. 그래서 '기금 소진 연도'가 오는 것이 아니라, 매년 모자라는 돈을 국고와 국채로 메운다. 연금 위기가 곧 재정 위기가 되는 구조다. 고금리는 그 비용을 키웠다. 프랑스 싱크탱크 iFRAP에 따르면 올해 2분기 프랑스 일반정부 이자비용은 1년 전보다 17.4% 늘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 헨더슨연구소는 지난 1월 낸 보고서 '구대륙, 새 성장'에서 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4개국의 공적연금은 보험료 수입만으로 따지면 지출보다 이미 GDP의 2~6%만큼 모자란다고 분석했다. 2024년 기준이다. 이 차액을 세금이 메운다. 각국 연금 당국이 발표하는 적자가 이보다 훨씬 작아 보이는 것은 국고 보조금과 목적세를 이미 수입으로 잡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COR은 지난 6월 연례보고서에서 프랑스 연금이 지난해 51억유로 적자를 냈다고 밝혔다. 국내총생산(GDP)의 약 0.2% 규모다. 적자 비율은 2030년까지 이 수준에 머물다 2045년 0.9%, 2070년 2.4%로 확대된다. 연금 지출은 GDP의 14.1%에서 15.3%까지 늘어난다.
독일 연금보험공단(DRV)에 따르면 법정연금 완충기금은 지난해 말 413억유로로 1.38개월치 지급액에 그쳤다. 2027년 말에는 0.36개월치로 줄어든다. 이를 메우려면 2028년 보험료율을 18.6%에서 19.9%로 올려야 한다.
◇왜 하필 은퇴연령인가
각국 정부가 은퇴연령에 매달리는 이유는 재정 효과가 가장 크기 때문이다. 지급 기간은 줄고 보험료 납부 기간은 늘어난다.
프랑스 감사원은 은퇴연령을 65세로 올리면 2035년 연금 수지가 84억유로 개선되고, 62세로 되돌리면 104억유로 악화된다고 추산했다. COR은 은퇴연령만으로 수지를 맞추려면 평균 은퇴연령이 2030년 64.4세, 2045년 65.8세, 2070년 67.6세가 돼야 한다고 봤다. 다만 은퇴연령 인상은 노동시장이 이를 흡수할 때만 재정개혁이 된다. 프랑스 국립통계경제연구소(INSEE)에 따르면 60~64세 고용률은 2023년 개혁 시행 이후 2024년 42.4%에서 지난해 44.4%로 올랐지만 여전히 유럽 주요국보다 낮다. 은퇴를 늦춰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비용은 연금 계정에서 실업급여와 장애급여 계정으로 이동할 뿐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일 프랑스의 61세 구직자 마리 카롱 사례를 소개했다. 지난해 12월 금융권 일자리를 잃은 그는 올해 일곱 차례 면접을 봤지만 모두 떨어졌다. 그러나 연금은 아직 멀다. 그는 63세가 돼야 수급을 시작할 수 있고, 온전한 연금을 받으려면 66세까지 버텨야 한다. 정부는 "더 오래 일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의 사례는 기업이 60대 구직자를 좀처럼 채용하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 연금개혁의 숫자 뒤에는 이런 공백이 있다. 은퇴는 늦춰졌지만, 일자리는 보장되지 않는 시간이다.
은퇴연령은 가장 가시적인 개혁 수단인 만큼 저항도 가장 크다. 프랑스는 1993년 연금 산정 기준기간을 늘리고 연금을 물가에 연동하는 개혁을 비교적 큰 충돌 없이 통과시켰다. 그러나 연령을 직접 건드린 2023년 개혁은 최대 규모의 시위를 불렀다. 부담은 기대수명이 짧은 저소득·육체노동자에게 더 크게 돌아간다. 독일 노후보장위원회가 '63세 연금' 폐지와 함께 건강상 이유로 조기 은퇴하는 노동자를 위한 '보호연금'을 대안으로 제시한 배경이다.
◇나비효과: 연금이 교육·치안·돌봄 예산을 잠식한다
연금 청구서는 다른 예산을 밀어낸다. 프랑스 정부가 지난달 13일 2027년 예산안 부속서로 처음 공개한 '공무원 연금 보고서'에 따르면 교육부 예산 891억유로 가운데 285억유로(32%)가 공무원 연금 재원으로 들어간다. 내무부(치안) 예산의 30%, 전체 부처 평균 13%가 퇴직 공무원 연금으로 나간다. 이 보고서는 2000~2023년 연금 지출이 GDP 대비 2.5%포인트 늘어나는 동안 교육 지출은 0.5%포인트 줄었다고 짚었다.

프랑스 정부는 2027년 예산안에서 교육부 예산을 11억유로 늘렸지만 학교 현장의 재정난은 풀리지 않았다. 청년 시위가 터진 지점도 여기다. '예산 부족 학교'에 항의한 6일 시위에는 내무부 추산 25만6000명, 주최 측 추산 45만명이 참가했다. 정부는 540억유로 규모의 긴축안에 공무원 임금 동결까지 담았다.
독일은 연방 조세수입의 29%, 약 1274억유로를 연금보험 보조금으로 투입한다. DRV는 정부가 2027년 보조금을 40억유로 줄이면 보험료 인상 시점이 앞당겨진다고 경고했다. 영국에서는 앤디 버넘 총리가 9월 29일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2030년 4월부터 트리플락을 손봐 확보한 재원으로 무상 국가돌봄서비스를 만들겠다고 했다. 연금은 물가 또는 2.5% 중 높은 쪽만큼 올리고 임금 대비 가치는 장기적으로 유지하는 '더블락'으로 바꾸겠다는 구상이다. 연금과 돌봄 예산이 정면으로 충돌하기 시작한 것이다.
OECD에 따르면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정부 총지출의 각각 28.7%, 28.5%를 연금에 쓴다. 정부 지출 4분의 1 이상이 연금으로 나간다는 의미다. 복지국가의 문제는 더 이상 지출 규모만이 아니다. 어느 세대의 지출이 다른 세대의 지출을 대체하고 있는가가 핵심이다.
◇한국에 주는 시사점: 기금이 있을 때 규칙을 만들어라
유럽의 연금 위기가 한국에 주는 교훈은 단순히 보험료율을 더 올리라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이미 한 약속을 어떤 규칙으로 고칠 것인가에 있다.
국민연금은 부과방식이 아니라 기금을 쌓아둔 부분 적립방식이다.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2026년 6월 말 기준 기금 적립금은 1866조원, 상반기 금액가중수익률은 27.22%로 잠정 집계됐다. 지난해에도 231조6000억원을 벌었다. 기금이 두둑한 동안에는 보험료 인상과 국고 투입을 둘러싼 유럽식 갈등이 당장 체감되지 않는다. 바로 그 점이 첫 번째 함정이 될 수도 있다.
기금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위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기금이 완충 역할을 잃는 순간 한국도 유럽 대륙형 국가들이 겪는 보험료율·국고 부담 논쟁에 직접 노출된다. 2023년 제5차 재정계산은 제도를 그대로 둘 경우 2078년 부과방식 비용률이 35.0%에 이른다고 봤다. 기금 없이 그해 보험료만으로 연금을 주려면 근로자 소득의 35%를 걷어야 한다는 뜻이다. 프랑스(27%)와 이탈리아(33%)보다 높다. 지난해 모수개혁으로 기금 소진 시점은 2064년으로 늦춰졌다. 그러나 개혁안(보험료율 13%·소득대체율 43%)을 적용하면 2078년 부과방식 비용률은 오히려 37.5%로 높아진다는 추계가 나왔다. 더 받기로 한 만큼 기금 소진 뒤의 청구서도 커진다. 이는 개혁안의 2033년 최종 목표 보험료율(13%)의 거의 3배에 달한다.

'기금 소진 연도'는 끝이 아니라 유럽식 국고 적자의 시작이다. 기금 수익도 늘 우상향하지 않는다. 지난 7월의 급락장은 기금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줬다. 기금 규모가 클수록 시장 충격이 장부상 평가액에 미치는 흔들림도 커진다. 당시 국민연금 기금 평가액은 한 달 사이 약 181조원 줄었다.
두 번째 함정은 두둑한 기금이 오히려 개혁 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기금 수익률이 높고 적립금이 커질수록 정치권은 구조개혁의 시급성을 낮게 볼 유인이 생긴다. 연금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증시 호황에 기대는 것은 제도 설계가 아니라 운에 의존하는 일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독일의 경험은 완충 재원이 정치적 특례의 재원으로 쓰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2013년 대연정은 연금보험에 쌓여 있던 약 300억유로의 적립금을 '63세 연금'과 어머니연금 재원으로 돌렸다. 법대로라면 내려야 했던 보험료율도 18.9%로 묶어 특례 비용을 댔다. 2004년 도입한 자동장치는 그 뒤 하한선과 특례에 봉인됐다. 한국 정부는 지난 6월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업무보고에서 구조개혁 방안을 뺐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구조개혁을 두고 "상당 기간 안 해도 되게 됐다"고 말했다. 증시 호황에 기댄 낙관은 독일이 반면교사로 남긴 바로 그 장면과 닮았다.
세 번째는 자동조정장치의 설계다. 한국에서 자동조정장치는 여야가 가장 팽팽하게 맞서는 쟁점이다. 출산율·기대수명에 따라 급여를 자동으로 깎는 장치로 읽히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답은 대칭과 합의였다. 적자가 나면 인상폭을 깎는 '브레이크'와 흑자가 쌓이면 나눠주는 '가속 페달'을 함께 법에 넣었다. 제도를 바꾸려면 초당적 연금그룹 전원이 동의해야 한다. 장치를 넣는 것보다, 정권이 바뀌어도 특례로 뚫리지 않게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네 번째는 은퇴연령과 고용을 함께 봐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은 국민연금 의무가입이 만 59세에 끝나지만, 수급 개시 연령은 2033년까지 65세로 늦춰진다. 의무가입 연령을 64세로 높이자는 논의가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고령자 일자리와 임금체계 개편 없이 연령만 올리면 문제는 연금 재정에서 실업·복지 지출로 옮겨갈 수 있다. 연금개혁은 더 오래 내고 늦게 받으라는 요구만으로는 지속될 수 없다.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노동시장과 함께 설계돼야 한다는 의미다.
유럽의 교훈은 결국 개혁의 시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데 있다. 프랑스는 연금 약속을 조정하는 사회적 합의 규칙을 충분히 제도화하지 못해 개혁 때마다 거리의 충돌을 반복했다. 독일은 지속가능성계수라는 자동조정 장치를 도입했지만, 소득대체율 하한과 정치적 특례가 쌓이면서 장치의 작동 여지가 좁아졌다. 한국은 아직 국민연금 기금이라는 완충 장치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완충 장치가 개혁을 미루는 명분이 되는 순간, 기금은 안전판이 아니라 재정 안정의 착시가 된다. 연금 약속을 조정하는 규칙은 기금이 남아 있을 때 만들어야 한다. 고령 유권자가 정치적 다수가 된 뒤에는 그 규칙을 만드는 정치적 비용이 훨씬 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