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이 인공지능(AI) 패권 경쟁을 주도하는 가운데 중견국들은 독자 AI 모델 개발보다 핵심 공급망 영향력 확보와 산업 전반의 AI 활용에 집중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알라스테어 필립스-로빈스, 테디 타윌, 샘 윈터-레비 연구원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연구원들은 최근 발표한 보고서 '중견국들이 AI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How Middle Powers Can Survive the AI Race)'에서 "AI 기술의 발전 속도와 기술 격차에 따라 미래 경쟁 환경이 달라질 것"이라며 "중견국은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기보다 글로벌 기술 생태계에서 대체할 수 없는 위치를 확보하고 국내AI 활용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자들은 미국과 중국이 AI 연구 인력과 컴퓨팅 자원, 투자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면서 다른 국가들의 기술적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지난 6월 앤트로픽의 첨단 AI 모델 '클로드 미토스'와 '페이블'에 대한 해외 접근을 차단하고 오픈 AI의 최신 모델 GPT-5.6 공개도 제한했다. 이는 미국 정부의 정책 결정에 따라 첨단 AI 접근권이 좌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됐다. 이에 저자들은 반도체와 제조업, 에너지, 자본, 인재 등 특정 분야에 강점을 가진 중견국들이 AI 경쟁의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비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보고서는 AI 경쟁의 미래를 첨단 AI 기술 발전 속도와 최첨단 모델과 대체 모델 사이의 성능 격차에 따라 4개의 시나리오로 구분했다.
첫 번째는 시나리오는 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소수 기업의 기술적 우위가 확대되는 '병목 지배 세계'다. 미국 일부 기업이 인간처럼 지적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범용인공지능(AGI)' 기술을 확보해 중국 등 경쟁국과의 격차를 벌리는 상황이다. 이 경우 미국은 국가안보 등을 이유로 첨단 모델의 해외 접근을 제한하게 되고, 세계는 최첨단 AI를 사용할 수 있는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로 나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첨단 반도체와 제조 장비 등 AI 공급망의 핵심 기술을 보유한 국가들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대만의 TSMC, 네덜란드의 ASML가 대표적이다. 한국과 일본, 독일 등도 반도체 공급망에서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첨단 AI 접근권을 확보할 수 있다. 호주, 프랑스, 인도, 말레이시아, 북유럽 국가들, 아랍에미리트(UAE)와 같은 국가들 역시 컴퓨팅 자원과 핵심 인프라를 기반으로 일정한 협상력을 가질 것으로 봤다.
두 번째는 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지만 최첨단 모델과 후발 모델 간 격차가 좁혀지는 '전환 또는 도태되는 세계'다. 중국 AI 모델인 딥시크의 'R1'이나 오픈소스의 등장은 적은 비용으로도 높은 수준의 AI 성능을 구현할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 경우 기술 자체의 희소성은 줄어들고 AI를 얼마나 빠르게 산업과 행정에 적용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게 된다. 캐나다와 싱가포르, 영국처럼 고급 인재가 풍부한 국가들은 빠른 적응이 가능하며, 한국과 일본, 독일 등은 제조업 기반을 활용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 인도와 필리핀처럼 저부가가치 산업에 의존한 국가들은 AI가 기존 업무를 대체하면서 경제적 충격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AI 기술 발전이 둔화되고 선도 모델과 후발 모델의 성능 격차도 작아지는 'AI 활용 경쟁 세계'다. 저자들은 이 경우 독자적인 '소버린 AI 모델' 개발 전략이 효과적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선도 모델과 대체 모델 사이의 격차가 작기 때문에 비교적 적은 시간과 비용으로 개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별로 특화된 AI 모델 개발은 기술적 자율성을 높이고 스타트업 생태계를 육성하는데 기여한다. 더불어 미국 AI 공급업체와의 협상력을 높이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마지막은 AI 기술 발전이 둔화되지만 소수 선도 기업의 우위가 지속되는 '차등 접근 세계'다. 첨단 AI 기술 발전이 정체되더라도 선도 기업들이 인재와 데이터, 컴퓨팅 자원을 독점하면서 기술 격차를 유지하는 경우다. 저자들은 이처럼 기술 격차가 큰 상황에선 독자적인 AI 모델 개발이 오히려 비효율적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신 기존 AI 모델을 산업별로 최적화하고 그에 따른 업무체계를 혁신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봤다.
저자들은 제시된 시나리오를 종합할 때 핵심 공급망에서 영향력 확보와 AI 활용 역량 강화가 한국을 비롯한 중견국에게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첨단 AI 접근이 제한되면 반도체 공급망 영향력이 중요한 협상 수단이 될 수 있고, AI 기술이 빠르게 확산되면 기존 제조업 기반과 산업 현장의 활용 능력이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인재 양성, 교육 투자, 스타트업 육성 등 AI 산업의 성장 기반을 강화하는 것도 핵심 과제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한국의 자동차 산업의 발전 과정도 참고할 만한 사례로 제시됐다. 현대자동차는 초기부터 모든 자동차 기술을 독자 개발하기보다 일본 미쓰비시로부터 엔진 기술을 도입하고 해외 자동차 업체와 전문가들의 기술과 경험을 활용하면서 경쟁력을 축적했다. 마찬가지로 AI 분야에서도 모든 최첨단 기술을 자체 개발하기보다 선도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기술을 습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 역량을 키워가는 방식이 효과적이라는 설명이다.
저자들은 "모든 시나리오에서 중견국의 최적의 경로는 자급자족이 아닌 스마트한 협력"이라며 "AI 기술의 미래가 명확해질 때까지 관망하기보다 기존 산업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해 핵심 공급망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국내 AI 활용 역량을 높이는 전략을 서둘러 추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