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가격이 7일(현지시간) 사상 최고가를 경신했다. 인공지능(AI) 붐을 타고 견조한 수요가 예상되는 가운데 공급 차질 우려가 커진 데다 미국의 관세 부과 가능성에 선제적으로 물량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겹친 영향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이날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 구리 선물 3개월물은 장중 1만4533달러(약 1946만원)를 찍으며 8개월 만에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구리 가격은 올해 들어서만 17% 올랐다. 12개월 기준 상승률은 47%에 달한다.
구리는 대표적인 산업 금속으로 가격 움직임이 경기를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한다고 '닥터 코퍼'(구리 박사)라는 별명이 있다. 다만 최근 구리 가격 상승이 전반적인 경기 호황을 가리킨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요 측면에서는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 붐이 상승세를 주도하고 있다. 구리는 데이터센터 서버의 전선과 회로기판은 물론, 전력 공급에 필수적인 변압기와 배선 설비의 핵심 원료로 쓰인다.
미국 원자재 데이터 업체 바차트의 윌리엄 오스나토 상품 리서치 책임자는 "최근 구리 가격 상승의 근본적 배경에는 급성장하는 AI 산업을 뒷받침하기 위한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수요가 있다"며 "이는 전통적인 경기 회복기에 나타나는 광범위한 수요 증가라기보다 특정 산업에 집중된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반면 공급은 줄고 있다. 국제구리연구그룹(ICSG)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세계 구리 광산 생산량은 전년 동기 대비 1.1% 감소했다. 제련 전 단계인 정광 생산량도 2.6% 줄었다. 페루와 몽골 등 신규 광산의 생산 증가에도 불구하고 칠레, 인도네시아, 콩고민주공화국 등의 주요 광산에서 생산량이 감소한 탓이다.
미국의 관세 부과 가능성도 구리 가격을 밀어올리는 주요 배경이다. 트레이더들이 관세 시행에 앞서 구리를 미국으로 들여오면서 다른 지역에서 공급이 빠듯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국 내 구리 가격이 해외보다 높게 형성되자 가격 차이를 이용해 해외에서 구리를 사다 미국에서 팔려는 차익거래가 급증했다. 미국은 7월에만 20만톤 넘는 구리를 수입했다. 12년 만의 최고 수준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2월 상무부에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른 수입 구리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8월부터 구리 반제품과 일부 파생상품에 50%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다만 정련 구리에 대해서는 상무부가 2027년 1월부터 15%, 2028년부터 30%의 단계적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제안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아직 최종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
ING의 에와 만테리 원자재 전략가는 "뉴욕상품거래소에서 구리 가격이 런던보다 높게 거래되는 건 미국의 관세 부과 가능성에 대한 시장의 기대를 보여준다"면서 "가격 차이가 클수록 관세 부과 위험이 커지고 있다는 뜻으로, 관세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계속되는 한 가격 변동성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