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중년남성이나 중년여성이라고 말할 때, 성공한 사오십대, 대기업이나 전문직에서 활약하는 남성 여성을 떠올리는가. 다소 무례하고 자기 관리가 안 된 지친 아저씨의 모습, 지하철에서 자리만 보이면 짐부터 던지고 수다스럽고, 아이들의 성적과 남편의 사회적 지위가 자기 생의 기준인 양 외눈박이로 사는 아줌마들의 모습을 더 많이 떠올린다면 지나친 비하일까.
일본 여기자가 10년간 쫓은 중년 남성들 이야기 ‘남성표류(메디치 미디어)’ 나 1982년생 아들이 오십을 훌쩍 넘은 엄마가 솔직히 적은 노트를 토대로 지은 만화 ‘엄마들(휴머니스트)’. 조건은 다르지만 ‘또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왜? 나도 중년이니까.
◇ 표류하는 중년남성 ‘왜’? 어찌 보면 ‘당연’?
일본 여성 르포 작가 오쿠다 쇼코는 중년 남성의 위기를 건강과 효도, 가정, 애정, 직업 등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목차만 보면 심리학자나 사회학자 혹은 의학자가 남성의 심리를 분석하고, 문제점에 대한 해결 솔루션을 제시하는 그렇고 그런 내용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 책은 ‘고백서’다. 저자가 그간 만난 200여명의 일본 중년 남성의 사례가 그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로 담았을 뿐, 대안이나 방책이 담겨있지 않다.
책에 등장하는 남성의 주장에 대해 여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별에 사는 인종이고 ‘뇌 구조’가 다르다고 하지 않는가. 동의 이전 이해가 우선이니 ‘왜’에 대한 그들의 고백을 들어보는 건 유의미하다.
‘남자의 갱년기, 외도의 속내’ 편을 보자. 남자에게 발기불능이란 성 문제가 아닌 건강과 자신감의 문제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그들은 하나같이 그 자신감을 자랑하고 확인하고 싶은 판단에 이른다. (여성인 저자도 이 대목에서 어이없어하지만, 여성 독자들은 화를 잠시 참자. 도덕적으로 옳다 그르다를 따지는 건 차후 문제다.) 처음부터 작정한, 시쳇말로 날 때부터 ‘바람둥이’야 어쩔 수 없지만, ‘젊은 여자’를 향한 이들의 ‘집념’은 건강을 회복한 남성이 남성성을 확인하고 싶다는 ‘자기 판단’의 결과물이다. 물론 그 남성의 부부관계를 비롯한 주변 환경이 결정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판단이 허망한 것임을 깨닫는다. A 씨는 이십 대 여자와 바람난 게 들켜 아내가 집을 나갔다. 그러고 나니 일상이 엉망진창이 되고 자신이 누렸던 일상이 누군가의 도움으로 지탱됐다는 걸 깨닫는다. 관계를 정리하고자 맘을 먹고 이별을 통보했을 때 A씨가 그 젊은 여인에게 들은 말은 이것이었다. “지식과 경험이 풍부해서 일에 대한 조언이나 큰 의지가 되었지만 역시 육체적으로는 젊은 남자가 좋아요.” 이 말은 A 씨에게 충격이었고 오히려 그 말 때문에 미련을 두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B 씨는 성 능력 회복을 위한 과다한 약물복용으로 오히려 부작용을 겪으며 고생했다. 더 큰 문제는 하는 일이 잘 안돼 경제적 능력이 줄었다. 그 순간 젊은 여성 앞에서 보여온 당당함이 온데간데없어졌다. 그 여인이 구박하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위축됐다는 고백이다. 그 여인과 관계 청산은 그 남자로선 당연한 선택이다.
‘결혼 안 하는 남자, 못하는 남자(애정 표류)’ 편에선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여성의 반대편에서 ‘백설공주를 찾아다니는’ 남성들의 심리 고백이, ‘일이 두렵다, 직장이 무섭다(직업표류)’에선 중간관리자로서 겪는 스트레스와 해고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이 고스란히 토로 돼 있다.
◇ 양다리 걸치는 아저씨 끝내 버리지 못한 엄마
고백 노트를 토대로 했다는 점에서 ‘엄마들’은 한국 중년여성들의 고백서이자 '야한 수다'다. 남성표류를 읽고 난 후 잡은 이 책은 더 불편했다. 무책임한 남자들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답답한 엄마의 모습이어서다. 그리고 일본이 아닌 대한민국의 현실.
'우리의 엄마들'을 이렇게 묘사하다니. 하지만 책을 다 읽은 후엔 쓸쓸해졌다. 또래 엄마들 모두가 고고하고, 자식의 '입시 앓이'를 대신하는 데 열중하고, 아침 운동을 끝내고 '브런치'를 먹는 모습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주인공 엄마 ‘이소연’은 이혼녀다. 결혼한 딸과 '백수' 아들이 있다. (아들이 그린 가족사에서 이혼의 책임은 절대적으로 남편에 있다. 백수로 엄마에 얹혀살던 시기 작가는 엄마의 ‘남친’의 늦은 방문도 당연히 이해하는 ‘쿨보이’다.) 상대 남자도 비혼이다. 하지만 엄마 친구의 엄마 중엔 유부녀도 있다. 유부녀이나 ‘외도 중’이다. 이유는 남자들과 다르지 않다.
주인공 엄마는 건물을 청소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다. 가족과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지만 법과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엄마들은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이들은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려 해도 방법조차 모른다. 노동자 엄마는 남친이나 애인이 필요해도 사치라고 느낄 때가 더 많다. 그렇게 정성을 쏟아도 또 다른 여인에 한눈파는 남친 앞에서 ‘내가 오늘 만해도 너한테 쓴 돈만 얼마인데’라는 계산을 하는 현실에 내몰려 있을 뿐이다.
엄마는 자신을 만나면서 또 다른 애인을 '비즈니스' 관계라며 설명하는 남자와 헤어지기로 열두 번도 더 결심한다. 너무 기가 막히지만 상대 여인이라고 다를까. 이 두 엄마는 남자를 원망하지만, 남자의 머리채 대신 서로의 머리채를 잡는다. 책은 엄마의 한탄으로 시작한다. “내 인생이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엄마는 슬프지만 담담해 보인다. 삶은 그저 살아가는 것인 양. 만화는 엄마가 헤어졌던 남친을 다시 받아들이고, 앞치마를 두른 남친이 밥상을 차리는 모습으로 끝난다. 결혼이나 동거를 택했는지 ‘형식’은 나오지 않고, ‘양다리’가 해결됐는지도 알 수 없다. 작가가 분가한 걸 고려하면 엄마는 종전보다는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두 편의 남녀고백서에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늙어감을 인정하는 것의 중요성, 그리고 친밀성의 중요함이다. 중년은 노년으로 가는 길이다. 늙어가는 것을 편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몸과 맘 모두가 뒤틀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늙어가는 과정의 섹스는, 오래가는 섹스는, 실패하지 않는 섹스는 힘의 문제가 아닌 상대에 대한 진정성과 친밀성에 있다.
고리타분한 이 결론을 나 역시 젊어서는 잘 몰랐던 거 같다. 왜? ‘젊음’이란 빛나는 이름 아래 감춰져 있고, 현란한 ‘기술’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년의 친구들이여, ‘안티에이징’에 너무 종속되지 말자. 그리고 '아직도 서툰 모습'에 창피해 하지 말자. 중년도 실수한다. 마흔의 ‘불혹’이 ‘불같이 유혹당하는 나이’이거나 ‘마흔은 또 다른 사춘기’라는 농담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
◇ 남성표류=오쿠다 쇼코 지음. 서라미 옮김. 메디치미디어 펴냄.268쪽/1만3800원
◇ 엄마들=마영신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372쪽/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