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단조로움의 연속, 집에서 밥 먹고 나온 뒤부터 '나'는 없다"

김고금평 에디터
2025.11.25 17:55

[김고금평의 열화일기] '영원한 국민배우' 이순재 타계 …그의 연기론과 배우 철학은 길이 남을 유산

정극에서 시트콤까지…"안 해본 역할 없어"

전공교수 "연극도 철학, 원작 읽는 인내 "

70년 연기 3원칙 불변, '다독' '대사' '변신'

장단음 반복, 건강보다 지적 재충전 '강조'

"아내 늘 '처녀 상태' 투덜…집에선 빵점"

병원 가기 전까지 무대 고수…"연기에 목숨"

25일 별세한 현역 '최고령 배우' 이순재. 향년 91세. /사진=머니투데이DB

25일 타계한 '영원한 국민배우' 이순재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배우' 그 자체였다. 생전에 그와 여러 번 인터뷰하면서 가장 많이 할애한 대화의 주제는 배우의 역할과 책임, 열정과 변신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그가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야동 순재'라는 이름으로 망가진 연기를 펼칠 때, 대한민국 청춘의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런 연기 변신에 대해 묻자 그는 되레 이렇게 반문했다. "한 작품에서 한 역할을 절대 재연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려고 해요. 앞의 것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도전의식이 결국 창조 아니겠어요?"

서울대 철학과를 나온 그는 대학 시절 연극반 대표로 활동했다. 연극 활동으로 수업에 빠질 때마다 전공교수들이 한 말들이 지금의 '연기론'에 불을 지폈다.

"그럼 연극도 철학이야. 4년간 철학을 한다고 무슨 철학을 제대로 하겠느냐. 차라리 연극의 원작을 열심히 읽는 인내를 키우는 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2009년 이순재 인터뷰 중에서)

25일 배우 이순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사진=뉴스1

그의 '거침없는 연기'는 3가지 원칙에서 나왔다. △다독 △대사 △변신이 그것이다. 오랜 기간 연극 무대에 오르면서 원작을 깊이 탐구하는 '버릇'은 가장 중요한 일상 중 하나였다.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건강 관련 책은 단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었다. 대신 고전 작품 읽기를 좋아했다.

연극 무대에 선다는 것은 깊이 있는 독서의 다른 말이었다. 작품을 제대로 읽지 않고 해석하지 않으면 원작의 의도를 벗어난 실망스러운 무대로 끝난 경우를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진 오닐, 셰익스피어, 아서 밀러 같은 고전들을 수십번씩 읽으면서 작가의 의도는 물론, 주인공이 지닌 내면세계를 샅샅이 탐구했어요."

그는 "독서는 사고의 영역을 넓히는 데 가장 필요한 조건"이라며 "아끼는 후배한테 '넌 이제 날라리 스타가 아니다. 돈 많이 벌었으니 이젠 지적 재충전을 해야 한다'고 자주 주문한다"고 했다.

배우의 배움은 '표준어'에 있다고도 했다. 그래서 늘 사전 갖다 놓고 장단음 연습을 밥 먹듯이 했다. 그는 "현대물은 대사를 강조하지 않아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대사가 아니다"며 "자기네 집에서 밥 먹다 나온 소리로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라고 단호하게 말하기도 했다.

'허준' 대장금' '이산' 등 사극을 주로 연출한 이병훈 PD가 어느 회식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도 나름 사극 전문가이고 한자도 어느 정도 자신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이순재 선배가 틀린 한자를 고쳐주거나 뜻을 바로 고쳐주는 걸 보고 '드라마의 톤과 틀'이 제대로 잡힌 적이 있었어요."

지난 2023년 연극 '리어왕' 역을 맡은 배우 이순재의 연기 모습. /사진=뉴시스

강직한 태도 때문에 연기 변신이 적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는 연극, 영화, 드라마 등 종횡무진 경계를 넘나들며 연기를 선보였다. 시트콤 출연 역시 '의도된 수순'이었다고 했다. 그는 "우리 세대 배우들은 연극에서부터 코미디를 했다"며 "그러니까 특별한 장르로 느끼지 못했고 연극적 훈련이 된 배우들은 다 할 수 있었다"고 했다.

못해 본 역할도 거의 없다. 1960년대 중반, 국내 형사 시리즈의 원조 드라마인 '형사수첩'에서 범인만 33번 했다. 그는 "모두 이런 역할 안 맡겠다고 도망갔는데, 나는 과감하게 도전했다"며 "이후 이 이미지를 벗으려고 멜로 드라마를 몇 번 이나 했는지 모른다"고 웃었다.

데뷔 이후 69년의 활동 기간, 의정 활동을 하거나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그의 모든 순간은 '연기'에 집중됐다. 70세 중반 나이에도 집에서 자는 날이 한 달에 5일 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야외 촬영도 마다하지 않는 열혈 배우였다. 그때 그는 "와이프가 몇십 년 동안 자신 있게 하는 얘기가 '나는 처녀나 다름없다'였다"면서 "미안한 마음이 작지 않다"고 했다.

배우 이순재가 지난해 12월31일 열린 '2024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받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방송화면

"돌아보면, 제 인생은 단조로움의 연속이었어요. 집에서 밥 먹고 나온 뒤부터 '저'는 없는 거죠. 집에선 빵점이에요. 하지만 배우라는 직업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직종이 아니라는 점에서 깨끗하다고 할 수 있죠. 언제나 새로운 것을 만들려는 의지나 욕구가 존재한다는 건 '남의 삶'을 사는 것 이상으로 흥분되고 흐뭇한 일이에요."

그 흥분되고 흐뭇한 일을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2022년 4편의 연극을 소화한 데 이어 2023년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의 주연까지 맡아 열연했고 지난해엔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에서 에스터를 연기하다 결국 하차했다.

삶의 남은 1인치까지 무대와 마주하고 싶었던 그의 의지와 욕망이 이제 다음 세대로 계승될 것 같다. 그럴 만큼 그가 보여주고 증명한 일들이 너무 강하고 위대하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 발인은 오는 27일 오전 6시20분, 장지는 이천 에덴낙원이다.

영원한 국민배우 이순재. /사진=정보석 SNS 캡처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