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秦)이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후 가장 공을 들인 일은 문자와 도량형, 화폐, 무기 등을 ‘표준화’한 것이다. 서양 최초의 제국인 로마도 문자·법은 물론 12진법을 바탕으로 하는 도량형 표준화로 제국의 기틀을 잡았다. 프랑스는 대혁명 이후 ‘앙시앙 레짐(구체제)’의 퇴출을 위해 과감히 미터법을 도입하고 이를 전 세계로 보급해 민주주의 확산에 기여했다.
이렇듯 강대국의 흥망성쇠에 열쇠였던 표준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 들어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 신기술의 표준을 선점하면 경쟁의 ‘룰 메이커’ 역할을 할 수 있어서다. 그만큼 우리 기업들이 세계시장을 선도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미국과 독일, 일본 등 주요국이 표준전쟁에 전력을 기울이는 이유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표준정책을 총괄하는 곳이 바로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이하 국표원)이다. 국표원은 1883년 화폐의 주조와 분석을 담당하던 전환국 분석시험소가 모태다. 가장 역사가 오래된 국가기관이다.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 KS표준과 인증, 안전·기술규제를 맡아왔다. 지난해 12월 취임한 허남용 국표원 원장을 19일 서울 서린동 머니투데이 본사에서 만나 국가 표준·인증·제품안전 정책 추진 방향을 들어 봤다.
-4차 산업혁명시대에 표준의 중요성을 정의하면.
▶4차 산업혁명은 단순한 기술 혁명이 아니다. 빅데이터, 인공지능, IoT 등 초연결, 초지능화 기술을 바탕으로 산업, 사회, 문화, 경제 등 인류의 삶 전체가 바꾸는 혁명적 변화이다. 이 혁명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들이 시장을 만들어 가고, 새로운 삶을 원하는 국민들이 시장을 결정하는 새로운 룰이 바로 표준이다.
-산업계에서는 표준이 규제라는 인식이 여전히 강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표준은 규제가 아니라 신(新)시장을 창출하는 수단이다. 표준을 개발해야 시장을 선점한다. 각국 정부가 추진하는 플랫폼전략이 바로 표준화전략이다. 과거에는 제품이 먼저 나오고 그게 시장에서 지위를 확보하면 표준이 됐는데, 지금은 표준이 먼저 만들어지고 제품이 이에 맞춰 나오는 식으로 바뀌었다.
-표준에 대한 주요국 동향은 어떤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주요국 모두 표준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첨단제조파트너십 정책으로 스마트 생산 플랫폼 표준화 등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독일 인더스트리 4.0 정책의 핵심도 결국 스마트제조모델 국제표준화다. 제조업 부흥을 노리는 일본은 산업재흥전략에서 로봇 등 5대 성장동력산업의 국제표준화를 추진하고 있다. 국표원의 경우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표준화 생태계 조성하고 기업의 혁신성장을 저해하는 기술규제 애로의 해소 등 4차 산업혁명 시대 정부 역할 대부분이 집중돼 있다. 혁신성장 지원을 위해 차질없이 정책 지원에 나서겠다.
-아이디어에 기반한 혁신기업들의 성장이 돋보이는데 지원방향은 무엇인가.
▶혁신기업들은 기술개발에 성공하고 있고 똑똑해진 소비자들은 새로운 제품을 요구하고 있지만 과거의 표준·인증제도가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새로운 산업 유형이나 시스템에 적용할 수 있게 KS인증제도 개편안을 올 상반기 중 마련할 계획이다. 반면에 일부 혁신기업들의 경우 오히려 표준·인증제도가 없어 신뢰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이들이 제때 시장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인증과정을 신속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들은 위해 융합신제품의 경우 6개월 이내 인증을 완료할 수 있는 ‘융합신제품 적합성 인증제도’를 도입했다.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융합신제품을 개발하는 기업의 시장진출 지원에 집중할 계획이다.
-기업 지원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제품안전 확보도 국표원의 본연의 역할이다.
▶소비자를 보호하는 것이 ‘제품 안전’의 전통적 의미였다면 지금은 제품 자체의 경쟁력 요인으로 진화했다. 그만큼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제도 운영이 중요한 시점이다. 기본적으로 안전성을 담보하되 기업에 불필요한 부담을 주기 않도록 안전규제를 개선하려고 한다. 사회적 논란이 됐던 ‘전기용품 및 생활용품 안전관리법’도 안전성만 확보되면 별도의 시험검사 없이 제조·판매가 가능하게 개정했다. 민간의 자율적 역량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실효성 논란이 계속되는 리콜제도 개선도 시급하다.
▶제품의 안전성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이를 제조하거나 판매한 주체가 스스로 책임지는 방식이 소비자 안전 확보 차원에서 가장 효율적이다. 현재 기업의 자발적 리콜을 활성화하고 리콜조치 불이행 사업자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리콜제도를 개선하고 있다. 다만 소비자 피해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민간 중심의 제품안전관리원을 설립해 관리감독을 강화할 계획이다.
-제품안전 관리를 민간에 맡기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다.
▶선진국은 시장에서 표준이 시작됐다. 미국의 UL인증도 미국 정부에서 인정하는 제도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정부가 산업정책을 펴다 보니 국가가 모든 것을 운영했는데 이제는 우리도 민간 중심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국표원이 아니라 업종별협회, 연구기관 등이 중심이 돼 관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국표원은 사후적으로 관리감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에도 부합한다.
-국표원장 재임기간 중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4차 산업혁명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점차 개인의 욕구가 다양해지고, 새로운 기술이 융·복합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제품과 서비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에 맞춰 국표원도 체질개선을 해야 한다. 인증제도의 혁신을 통해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신기술에 기반한 융합신제품이 가장 먼저 시장에 출시할 수 있는 나라, 제품안전기반 확립을 통해 새로운 환경변화에도 국민들이 안전하고 편리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나라, 보다 체계적인 기술규제대응을 통해 우리 기술과 제품을 가지고 세계시장으로 가장 쉽게 수출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 수 있게 노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