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계시에 사로잡혀 삶이 송두리째 바뀐 한 남자가 있다. 스스로 옳다고 믿는 길을 따르지만, 그 믿음이 타인을 향한 폭력이 되는지도 모른 채 전진하는 남자. 세상의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도, 자기 안의 진실만을 붙드는 남자. 그리고 신을 믿는 것처럼 자신을 믿고 싶은, 어쩌면 그 누구보다 흔들리는 남자. 그는 계시를 좇으며 달려가지만, 그 끝에서 마주한 것은 신이 아닌 또 하나의 거대한 물음이다.
믿음이 광기로 변질되는 과정을 담은 넷플릭스 영화 '계시록'은 성민찬 역을 맡은 류준열의 얼굴로 완성되는 작품이다. '계시록'은 실종 사건의 범인을 단죄하는 것이 신의 계시라 믿는 목사와, 죽은 동생의 환영에 시달리는 실종 사건 담당 형사가 각자의 믿음을 쫓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는 스릴러다.
류준열은 이 이야기에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믿는 목사 성민찬을 연기한다. 작은 교회를 이끌던 민찬은 어느 날,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믿고 변모하기 시작한다. 류준열은 복잡하고 위험한 믿음의 서사를 끌고 가며 본 적 없던 동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늘 내가 연기하는 모습이 쑥스럽다. '계시록'도 두 눈으로 못 보고 실눈으로 봤다. 늘 연기가 만족스럽지 못해서 항상 후회가 가득하다"라고 말한다.
'더 에이트 쇼'의 현실적인 3층 거주자부터 '외계+인'의 얼치기 도사, '올빼미'의 맹인 침술사까지. 시대와 장르를 넘나들며 변신을 거듭해 온 류준열은 이번 '계시록'에서 목사라는 직업 너머, 믿음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캐릭터의 심연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번에는 연기를 과감하게 했어요. 원래는 생활감 있는 연기를 선호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느낌보다는 믿음이라는 거대한 에너지를 표현하려고 했어요. 기존보다 더 동적으로, 목소리 변화도 시도했고요. 참고한 목사님들이 있었는데, 말 잘하시는 분들이었어요. 달변가 같은 느낌이랄까."
그는 캐릭터의 믿음을 단지 신앙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류준열은 이 작품이 종교적인 테두리를 넘어선다고 말한다. 신앙은 인간이 각자 품고 있는 믿음의 형상일 뿐이며, 그것이 어떤 행동을 낳는지를 이야기하는 게 '계시록'이라고 설명한다.
"죽으면 어디로 갈까, 이건 종교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잖아요. 그러니까 종교를 떠나서도 이야기할 수 있는 거리들이 있어요. 내가 옳다고 믿는 걸 선택하는 과정, 그게 결국은 믿음이니까요."
연기는 결국 타인의 마음을 살아보는 일이고, 그 안에서 신념은 늘 질문을 동반한다. 성민찬은 절대적인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믿지만, 그 믿음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의심도 함께 끌고 가야 하는 인물이다. 류준열은 그 고민을 연기의 밀도로 녹여냈다.
"성민찬은 악역이라기보다는 신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걸 욕망처럼 표현하고 싶지 않았어요. 누군가는 악하다고 보겠지만, 저는 이 인물의 믿음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따라갔던 것 같아요."
그는 성민찬의 연기를 위해 원작 웹툰의 캐릭터와는 다른 디자인을 택했다. 슈트와 안경, 올백 헤어처럼 직관적인 외양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목사의 모습을 구현하려 했다. 그래야 이 인물이 가진 신념과 선택이 더 진실하게 다가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웹툰 속 성민찬은 굉장히 세속적으로 그려져 있어요.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렇게 하면 뻔할 것 같았죠. 그래서 바꿨어요. 예를 들어 ‘교회는 죄인이 오는 곳’이라는 대사가 있어요. 그 대사에 맞는 보다 현실적인 인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계시록'의 마지막 장면은 극 전체를 꿰뚫는 상징이자 류준열의 연기적 집약점이다. 이 장면을 두고 그는 감독과 오랜 시간 고민했고, 마침내 예기치 못한 계기로 감정의 문을 열었다고 말한다.
"이 장면을 두고 촬영 들어가기 직전까지 고민이 정말 많았어요. 그런데 연상호 감독님이 갑자기 웃긴 영상을 보여주셨어요. 그걸 보다가 문득 ‘이게 설마 힌트인가?’ 싶을 만큼 깨달음을 줬어요. 테이크 하나가 5~6분이었어요. 감정이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눈물도 나고 진짜 복합적이었죠. 컷 안 하고 끝까지 가달라고 했어요."
이번 작품은 연상호 감독과의 첫 협업이기도 했다. 서로의 의견이 유기적으로 반영된 대사와 장면들, 그리고 캐릭터 해석은 그에게 새로운 연기 경험을 안겼다. 무엇보다도 감독의 개방적인 태도에서 큰 신뢰를 느꼈다고 한다.
"녹차 마시면서 경찰을 지켜보는 장면이 있었어요. 원래는 대사가 엄청 많았는데 다 뺐어요. 계시에 순종하는 인물로 그리고 싶었거든요. 그건 감독님 의견이었고, 캐릭터 자체는 제 의견도 많이 들어갔어요. 감독님과 진짜 많이 이야기했어요."
믿음이라는 개념은 이번 작품을 통해 그에게도 새로운 메시지를 남겼다. 단순히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라, 삶을 관통하는 태도로서의 믿음. 그것은 연기에 대한 그의 태도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연기적으로는 제가 요즘에 믿는 믿음은 상처받지 않고 촬영하는 거요. 그 과정이 누군가의 아픈 과거가 된다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한 거죠. 인생에 있어서 제가 믿는 건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하는 거요. 좋지 않은 일이 벌어져도 제가 견딜 수 있으면 견디고 가는 게 맞지 않을까 해요. 좋은 것만 보려고 하는 거죠. 신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는 시련만 준다고 하잖아요. 분노하고 화살을 남에게 돌리기엔 인생이 너무 속상한 거죠. 견딜 수 있는 믿음으로 나아가자는 게 있어요."
올해는 그가 데뷔한 지 10년이 되는 해다. 지나온 시간에 대해 그는 "그저 감사하다"라고 말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방향을 찾고자 하는 치열함이 배어 있었다.
"이제는 좋은 것만 보려고 해요. 지금 제 자리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여기까지의 위치를 기대하지 않았거든요. 상상도 못 한 일이었죠. 그저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감사한 마음으로 가는 거예요. 물론 이면에는 괴로운 게 있죠. 다음 10년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감이 안 와요. 여기까지는 흔히 하는 노력으로 온 거 같은데 뒤의 10년은 그런 차원이 아닌 것 같아요. 오르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려우니까 그 정답이 보이지 않아요.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막연함이 있어요. 그러면서도 피식피식 웃게 되는 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내가 철들었나?’ 싶어서예요. 여전히 답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