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티스트의 진심은 가장 느리고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도착한다. 그래서 종종 사람들은 그 순간을 놓친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무대와 쉴 새 없이 교차하는 콘셉트, 매번 새 얼굴을 요구하는 아이돌 세계에서 진짜 얼굴은 오히려 감춰진다.
NCT 마크는 그 세계의 정중앙에서 10년을 버텼다. NCT DREAM, 127, U, 그리고 SuperM까지. SM엔터테인먼트 안에서 마크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은 유닛은 거의 없었다. 늘 새로운 팀의 중심이자 끝이었고, 두 공간 사이를 채우며 연결하는 사람. 무대 위에서 랩을 쏟아내고, 비트 위를 걷고, 전 세계를 누비는 동안 마크는 쉼 없이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으로 기억됐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그가 진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을 때,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을 때, 마크는 누구인지.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마크의 첫 솔로 정규 1집 ‘The Firstfruit(더 퍼스트프루트)’는 그 목마름을 해갈한다. 이 앨범은 마크에 의한, 그리고 대한, 또 위한 기록이다.
마크는 ‘The Firstfruit’를 “제 인생을 바탕으로 만든, 정말 모든 걸 쏟아부은 앨범”이라고 소개한다. 그간 NCT라는 유기적이고 다면적인 프로젝트 안에서, 수많은 조합과 활동 속을 성실히 헤집고 다니던 마크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무려 정규라는 이름으로 꺼내든 기록이다. 13곡으로 이뤄진 이 앨범은 하나의 완결된 여정이자 아티스트 마크의 내면을 세밀하게 따라가는 지도다.
이 앨범의 축인 타이틀 곡 제목은 ‘1999’다. 마크가 태어난 해, 그리고 이번 앨범의 출발점이다. 그는 이 곡에서 마치 제2의 탄생처럼 현재를 노래한다. 세기의 마지막 해에 태어난 한 소년이, 가장 역동하는 나이 스물여섯에 비로소 자신만의 첫 열매를 수확하는 순간이다.
경쾌한 브라스, 펑키한 기타 리프, 타이트한 랩과 부드러운 가성. ‘1999’는 마크의 다양한 결을 모두 펼쳐 보이며 그가 그간 어디에 있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감각적으로 제시한다. 이 곡은 마크의 출발선이자 선언이고, 자기 자신에게 바치는 헌사다.
‘The Firstfruit’는 마크가 머물렀던 총 네 개의 도시 토론토, 뉴욕, 밴쿠버, 서울을 중심으로 서사가 짜여 있다. 하나의 챕터가 끝날 때마다 새로운 감정과 기억, 태도들이 등장한다. 토론토의 따뜻함에서 시작해 뉴욕의 혼란을 지나 밴쿠버의 감성으로 들어가고, 서울에서 가장 현실적인 나로 되돌아온다. 마크라는 사람을 만든 도시들, 그 안에서 살아남고 사랑하고 상처받고 성장한 이야기가 순서대로 흐른다.
중간중간 드러나는 마크의 랩은 여전히 묵직하고 또 날카롭다. ‘Righteous(라이처스)’나 ‘프락치(Feat. 이영지)’는 힙합의 구조 안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이 앨범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그가 랩이 아닌 노래로 감정을 꺼낼 때다. ‘Raincouver(레인쿠버)’의 감성적이고 담백한 회고, ‘Loser(루저)’의 쓸쓸한 회한, 크러쉬와 하모니를 낸 ‘Watching TV(와칭 티브이)’의 감미로운 무드. 그 어디에서도 강한 마크는 없다. 대신 망설이고 회상하고 때로는 작아지는 마크가 있다. 우리가 그동안 놓쳤던 마크다.
그리고 가장 깊숙한 순간은 12번째 트랙 ‘Mom’s Interlude(맘스 인터루드)’이다. 피아노 연주는 그의 어머니가 맡았다. 따뜻하고 조심스러운 멜로디 위로 마크는 아들 이민형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조용히 대화를 나눈다.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을 꼽자면 아마 어머니일 거예요. 어머니께서는 예전부터 피아노를 전공하셨고, 지금도 제가 피아노나 코드, 악보와 관련해 궁금한 점이 생기면 항상 조언을 구하곤 해요. 그래서 자전적인 이야기로 채운 이번 앨범에 어머니의 연주가 담긴 곡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습니다. 이렇게 제 첫 솔로 앨범에 어머니와 함께한 트랙을 수록할 수 있었던 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의미 있고 소중한 경험인 것 같아요.”(마크)
이 말 속에는 지금껏 우리가 알던 마크와는 또 다른 결이 있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한 사람의 진솔한 내면을 고백하는 뮤지션. ‘The Firstfruit’는 이처럼 마크라는 세계의 숨겨진 방들을 하나씩 열어젖힌다.
마크는 오랫동안 ‘프로 데뷔러’로 불렸다. 매번 다른 옷을 입고 무대에 오르던 사람. 하지만 진짜 마크는 그 모든 역할과 분장을 벗고 난 다음, 조용히 마이크 앞에 선다. 그리고 노래한다. 자신이 걸어온 도시들, 자신을 사랑해 준 사람들, 그리고 가장 솔직했던 순간들에 대해.
이 앨범은 화려하지 않다. 대신 아주 깊다. 누군가에게는 가장 마크다운 순간일 테고, 또 누군가에게는 가장 낯선 마크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이 앨범이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마크는 이 앨범을 통해 무대를 넘어 삶을 이야기하고, 역할이 아닌 자신을 노래하며 아티스트로서 서사를 드러냈다. 13개의 트랙이 한 사람의 성장기를 구성하고 그 안에 담긴 감정과 경험은 마크라는 이름을 처음부터 다시 읽게 만든다. 그래서 이 앨범은 마크가 스스로에게 바친 첫 번째 열매이자, 누군가의 마음속에도 작은 씨앗이 되어 심어지는 유의미한 진심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