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2001)에서 ‘상우’(유지태)가 ‘은수’(이영애)와 이별의 순간에 전했던 말이다. 사랑을 했더라면 누구나 느껴봤을 감정이기에 많은 이의 가슴을 적셨던 명대사로 남았다. 허나 시간의 흐름 속에 여러 다른 사랑을 만나다 보면 어느새 배우게 된다. 어쩌면 사랑이 변한 건 아니었다고, 그저 사람이 또는 상황이 변한 것이었다고.
맞다. 사실 사랑은 항상 같은 감정이었는지 모른다. 그 마음만 살펴보면 언제나 순수했고, 늘 맹목적이었으며, 뜨겁게 타올랐다. 마치 우주의 섭리가 상대방에게 흘러 모이듯, 우리는 이유도 모른 채 그렇게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져들었다. 그 사람이기에 가능했던 정답 없는 감정이었다.
다만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왜라는 요소들이 사랑에 끼어들 때, 타오르던 불꽃이 서서히 사그러들었다. 때로는 갑자기 차게 식기도 했다. 시작도 그러했듯, 마침의 순간에도 이유는 없었다. 이번 역시 사람이, 또는 상황이 변했을 뿐이다. 하여 누구나 내 감정이 가장 찬란했던 그 순간, 사랑에 빠졌던 그 때를 곱씹으며, 다시 한 번 그 감정이 찾아오길 바라곤 한다.
넷플릭스 영화 ‘고백의 역사’(각본 감독 남궁선)엔 새로이 사랑을 준비하는 고등학생 박세리(신은수)가 있다. 세리의 짝남은 같은 학교의 인기남 김현(차우민)이다. 순간 오고 간 눈빛, 스쳐 지나간 미소, 무심하게 나눈 몇 마디로 이미 교감은 완료, 이에 세리는 고백 이벤트를 준비한다. 세리를 돕기 위해 서울에서 새로 전학 윤석(공명)을 비롯한 절친 네 명이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학알’ 1000개 접기부터 시작하는 세리의 고백 작전은 그렇게 거침없이 시동을 건다.
박세리가 밟아가는 ‘고백의 역사’엔 뻔한 사춘기의 질풍노도가 없다. 다른 청춘 로맨스에 흔히 등장할 사랑의 라이벌이나 진로에 대한 고뇌, 학교 폭력, 외모 고민, 부모와 갈등도 중요하지 않다. 존재한다 해도 작은 설정값에 불과하다. 수학여행 마지막 날 캠프 파이어에서 있을 법한 과한 감성팔이 없이,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의 하루하루를 발랄하게 그려낼 따름이다.
사랑을 키워가는 과정도 심플하다. 좋아하는 마음을 딱히 숨기지도 않고, 다가오는 사람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감정이 변했다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상대 역시 이를 쿨하게 인정한다. 그럼에도 눈물, 콧물 쏟으며 목을 매는 구구절절한 고백보다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건, 이 영화가 사랑이라는 순수한 감정을 제대로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세리는 그렇게 일방통행로를 달려간다. 양 갈래 길이 나와도 자신이 가야할 길을 순식간에 결정하기에, 세리는 그저 직진할 따름이다. 구불구불 꼬여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세리의 악성 곱슬머리뿐, 그 또한 ‘서울 매직 스트레이트’로 쫙 펴버리면 그만이다. 세리의 감정 앞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테토녀’ 세리는 그렇게 사랑을 향해 진격한다.
모든 고백이 세리에서 시작되고, 매조짓기에 역사의 중심엔 늘 배우 신은수가 서있다. 2002년생의 어린 연기자이지만, 어느덧 필모그래피에 20여 작품을 새겨 넣은 연차 높은 배우다. 데뷔작인 영화 ‘가려진 시간’부터 최근작인 tvN ‘반짝이는 워터멜론’, 디즈니+ ‘조명가게’ 등 매 작품마다 연기로 호평 받아왔다.
신은수는 이번 작품으로 자신의 학생 연기에 정점을 찍는다. 1998년을 살아가는 고등학교 3학년 여고생 박세리와 신은수 사이에선 전혀 이질감을 찾을 수 없다. 신은수는 마치 자신이 세리인 것처럼 누구나의 학창 시절을 되돌린다. 어느 한구석 튀는 것이 없는 평범한 여고생 역할이기에 연기로 채워 넣는 사소한 디테일들이 모두 사랑스럽다. 특히 자유롭게 구사하는 부산 사투리는 배우의 고향을 의심케 할 수준이다. 이번 작품에 녹아든 그의 노력을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고백의 역사’가 그리는 고등학생이라는 신분과 1998년이라는 시대 배경은 그 시절을 살아왔던 사람들을 위한 추억 버튼이다. 그러나 그때의 감정을 “어린 시절엔 참 순수했다”고, “그 시절은 때 묻지 않았었다”며 단순히 과거의 풋사랑이라 치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사랑이란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는 이야기로, 늘 솔직하게 마주하고, 아껴야 할 보석 같은 감정이라 말한다.
그렇게 ‘고백의 역사’는 지금 학창시절을 살아가는 10대부터, 과거에 그 시절을 살아왔던 장년층의 마음까지 몽글몽글하게 매만진다. 하여 우리는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라는 드라마 ‘천국의 계단’(2003)의 대사처럼, 영화와 함께 사랑의 설렘이 다시 돌아오고 있음을 느낀다. 누구나 지금까지 써왔던 ‘고백의 역사’가 있을 터, 찬란했던 그 때의 설렘을 다시 한 번 펼쳐볼 순간이 왔다.
영화 ‘고백의 역사’는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할 수 있다. 12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21분.
권구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