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신세경이 총성과 순애보가 교차하는 첩보극 한가운데 섰다. 영화 '휴민트'(감독 류승완, 제작 외유내강)에서다. 안방극장에선 꾸준히 주연을 맡으며 안정적인 커리어를 이어왔지만, 스크린 주연은 2014년 '타짜-신의 손' 이후 12년 만이다. 오랜만의 영화 출연에 "설레고 기대가 크다"는 신세경은 작품을 향한 두터운 진심을 드러냈다.
'휴민트'는 남한 국정원 블랙 요원 조 과장(조인성)과 북한 보위성 조장 박건(박정민)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 여자로 인해 얽히는 첩보 액션 멜로다. 작전 실패 이후 새로운 정보원을 찾은 조 과장, 과거 약혼자를 쫓아 국경을 넘은 박건, 그리고 그 사이에 선 북한 식당 종업원 채선화(신세경)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신세경은 "선화를 구하기 위해서 두 남자가 자동차 악셀을 확 밟을 때 심장이 두근거렸다"며 웃어 보였다.
"일단 설레고 기대가 정말 컸어요. 시사회에서 많은 분들이 재미있게 봐줬다고 하니까 기분도 좋았고요. 제 연기를 객관적으로 보기 어려워서 기술 시사 때도 긴장을 많이 했어요. 막상 보고 나니까 흥미롭고 여운이 짙게 남더라고요. 그래서 관객분들이 어떻게 봐주실지 더 궁금했죠."
신세경이 연기한 채선화는 감정에 기대기보다 상황을 읽고, 관계보다 현실을 먼저 계산하는 인물이다. 신세경은 이 캐릭터를 단순히 강한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하지 않았다. 대신 삶의 조건이 한 사람을 어떻게 단단하게 만들었는지에 집중했다.
"채선화는 삶에 대한 의지가 정말 강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텍스트를 꼼꼼하게 보면 보통의 결단으로는 선택하기 어려운 길을 계속 걸어왔거든요. 삶을 지키기 위해서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죠. 채선화를 움직인 원동력은 결국 생존이라고 생각했어요."
영화 중반까지 채선화는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늘 한발 물러서 있고, 자신의 상태를 노출하지 않는다.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이 인물의 생존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반부 전 약혼자 박건이 총상을 입는 순간 선화는 처음으로 억눌러왔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낸다.
"선화는 그간의 삶의 태도 때문에 힘듦을 쉽게 표현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절제된 느낌을 보여주다가, 박건이 총을 맞았을 때 처음으로 제대로 된 감정 표현을 해요. 그 장면이 저한테도 굉장히 중요했어요."
때문에 영화에는 선화의 클로즈업 샷이 유독 많다. 인물의 감정 진폭 자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카메라는 자연스럽게 얼굴에 더 가까이 다가가며 그 미묘한 결을 포착한다.
"선화는 표현의 폭이 드라마틱하지 않아요. 그래서 감독님이 클로즈업 신을 많이 쓰신 것 같아요. 진폭은 좁지만 미묘하게 변화하는 감정에 대해서는 디테일하게 들어가야 했거든요. 조 과장과 호텔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혼란스러움과 수치심의 미세한 진폭을 담아내야 했죠."
'휴민트'의 가장 큰 백미는 선화와 박건의 멜로다. 스킨십을 하거나 둘의 전사를 드러내는 장면은 없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애달픈 서사를 완성한다. 그는 "헤어지게 된 계기를 살펴보면 가족과 연관돼 있다. 사실 양쪽이 다 이해되는 상황이라 둘의 인생이 더 기구하다고 느꼈다. 재회했을 때 선화는 너무 위험한 상황 한가운데 서 있으니까 박건이 근처에 오지 않길 바랐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작품에서의 멜로가 되게 좋은 기억으로 오래오래 남을 것 같아요. 여운이 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영화의 후반부에 짙게 깔리는 정서 그대로 마음에 오래 남아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이 영화가 어찌 됐든 멜로를 주로 다루는 작품은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짙은 여운을 가져가는 건 아주 큰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채선화를 완성하기까지 신세경이 가장 오래 붙잡고 씨름한 요소 중 하나는 말투였다. 어색한 억양 하나만으로도 캐릭터의 설득력이 무너질 수 있는 만큼 그는 사투리를 제 것으로 체화하는 데 집중했다.
"사투리 연기는 항상 조심스럽고 겁이 많아요. 새로운 도전에 대해 부담을 많이 느끼는 편이거든요. 이번에는 북한 사투리까지 써야 해서 더 부담이 있었어요. 선생님께 계속 지도받고, 녹음해서 반복해서 들으면서 연습했어요. 캐릭터에 맞게 또래 평양 여성 느낌으로 맞추려고 했고요. 노래 가사도 북한 말로 해야 해서 더 신경을 많이 썼죠."
이처럼 철저한 준비 과정은 그의 연기관과도 맞닿아 있다. 과거에는 미래를 상상하며 막연한 불안과 고민에 머무르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신세경은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옮겼다. 주어지는 역할을 성실하게 소화하는 것이 배우로서 가장 중요한 책임이라는 판단이다.
"예전에는 실체가 잘 안 보일 때도 많아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저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최선을 다해 소화하자는 마음이에요. 어쨌든 대중이 보고 싶어 해주셔야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는 거잖아요.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 같아요. 찾아주시는 곳에서 주어진 걸 열심히 하는 거죠."
신세경은 1998년 데뷔 이후 어느덧 28년 차를 맞았다. 아역 시절을 지나 청춘스타, 그리고 지금의 성숙함에 이르기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는 단절 없이 이어져 왔다. 오랜 시간 현역으로 활동해 온 배우에게 흔히 따라붙는 불안이나 조급함은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큰 굴곡 없이 연기를 이어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더 큰 의미를 둔다.
"제가 좀 독특한 지점인 것 같긴 한데 불안함이 별로 없어요. 내적으로 스스로 뿌듯함을 느낀다고 해야 할까요. 가끔 예전 작품을 찾아보면 '아, 오래 했구나' 싶어요. 연기한 시간이 꽤 됐는데, 아직까지 큰 탈 없이 하고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해요."
'휴민트'는 오는 11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