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예능 ‘소라와 진경’을 작정하고든, 무심코든 보기 시작한 사람은 흠칫 놀랐을 수도 있다. 그의 데뷔 때부터 지켜봤던 올드팬이든 아니면 최근 이들의 활약을 알았던 사람이든 일단 그들의 나이에 흠칫 놀란다. “아니 홍진경이 이제 50이라고?” “이소라가 벌써 58세가 됐어?”하고 반응할 만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만, 가끔 되돌아보는 사람에게 놀라움을 안기기도 한다. 그것이 시간이 놀라움이자 무서움이다. 단지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스스로 규정하기 시작하면 사정없이 인생을 가두는 숫자. ‘소라와 진경’은 그 숫자를 무위로 돌리려는 왕년의 두 ‘톱모델’의 도전기를 다루고 있다.
지난 26일 공개된 첫 방송은 마치 100분 남짓의 방송으로 여러 재미를 볼 수 있는 ‘복합장르 예능’의 모든 것을 보여준 것 같았다. 이것이 ‘소라와 진경’을 본 사람들의 두 번째 놀라움이다. 초반 이들의 재회를 다루고 15년 만의 설레는 느낌을 담아낸 부분에서는 아예 MC의 존재도 지우면서 최근 유행하고 있는 ‘연프’(연애 프로그램)의 현장감을 살렸다.
토크가 들어오면서부터는 또 역시 많이 방송되고 있는 관찰 예능과 스튜디오 토크를 합친 장르를 떠올리게 한다. 원래 故 최진실, 이영자, 정선희, 엄정화 등과 뭉쳐 다니며 연예계 대형 파벌(?)을 이뤘던 이들 사이에도 서먹해지던 시절이 있었음을 보이며 휴먼 예능의 모습도 보여준다.
이들의 일상을 보여준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파리패션위크 진출을 목표로 잡은 도전형 예능의 모습을 보여준다. 원래 1990년대 톱모델이었지만 저마다의 이유로 런웨이를 멀리했던 두 사람은 “다소 늙었다”는 후배 모델들의 뼈 때리는 지적을 받아 가면서도 인생 마지막일지 모르는 런웨이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다.
이렇게 많은 장르를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제작진이 다채로웠기 때문이다. MBC ‘라디오스타’로 잔뼈가 굵은 강성아PD와 ‘송스틸러’ 등으로 경연 예능을 추구했던 장하린PD가 중심을 잡았다. 다채로운 소재로 캐릭터를 길어 올리는 강성아PD의 능력은 ‘탐조’를 추구하면서 ‘인새타그램’을 운영하는 이소라의 다른 면을 잡아냈다. 경연에 적합한 장하린PD는 후반부 펼쳐지는 모델로서의 도전 부분에 장력을 더하며 긴장감을 자아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출연자가 뭐니 뭐니 해도 바로 ‘이소라’이고 ‘홍진경’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 번째 놀라움이다. 1992년 슈퍼모델 선발대회 1기 우승자 이소라와 1993년 2기 베스트 포즈상을 수상한 홍진경은 한국 모델 ‘1세대’가 배출한 대표적인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두 사람은 모델 본업뿐 아니라 각종 예능에서 활약했는데 이소라가 주로 MC와 멘토 등 진행역할을, 홍진경은 버라이어티와 관찰 예능, 오디션과 연애 프로그램 그리고 자신의 유튜브 채널 등을 통해 전방위로 활약했다.
일단 프로그램은 15년 만에 만나는 두 사람의 사연에 집중하면서, 홍진경의 암 투병과 고인이 된 최진실의 자녀 최환희, 최준희를 돌봤던 일을 자연스럽게 끌어냈다. 또한 주변 사람을 살뜰하게 챙겼던 그의 세심한 면이 김치 사업가로서도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꼽으며 대중은 몰랐던 홍진경의 또 다른 면을 만들어냈다.
이소라 역시 방송을 통해 집에서 휠체어를 탈 수밖에 없었던 녹화 중 부상 이후의 삶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최진실의 존재 그리고 남편을 잃었던 정선희, 한때 목소리를 잃었던 엄정화의 사연과도 묶이면서 겉으로 봤을 때는 세 보이지만 결국 여린 인간 중 한 명이었던 모임의 정체성도 차츰 드러냈다.
후배들과의 경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시대에 밀려나 버린 ‘50대 모델’로서의 비애도 보이지만 그 모습이 너무 비루하거나 비참하지는 않다. 두 사람은 후배들에게 요즘의 것을 배우기도 하지만, 자신의 것을 지키는 힘도 보여주면서 그들이 아직은 열정과 힘이 있기에 자신의 분야에서도 다시 피어날 수 있음을 예감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한때 자신의 나이를 보고 놀라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이소라의 모습은 나이가 드는 건 모두에게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잔잔한 감동을 자아낸다.
이들의 런웨이는 지난 3월 화제가 된 탓에 이미 시청자들은 ‘스포일러’를 당한 채 프로그램을 접하게 됐다. 하지만 방송을 통해 베일을 벗은 프로그램은 그들의 도전만이 프로그램의 전부가 아님을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 자신의 현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꿈을 어떤 방식으로 간직하고 있었으며 그 부활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찬찬히 보여주려고 시도하고 있다.
TV 예능은 어느새 젊은 층은 다소 거리를 두는 매체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로 최근 예능 프로그램은 좀 더 높은 나이대를 대상으로 그들의 도전이 여전히 찬란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라와 진경’은 ‘올드 모델’들을 데리고 하는 ‘첨단의 예능’에 가깝다. 단순히 순간의 재미에서 배어나는 휘발성 웃음이 아니라 조금 더 곱씹고 생각을 해야 하는 사유의 공간을 제공한다.
벌써 33년 차 모델이 된 이소라와 홍진경. 마치 KBS2 ‘골든걸스’를 보는 듯한 이 버라이어티는 화려한 성공의 이미지는 아니지만, 누구나 벅찬 마음으로 볼 수 있는 ‘흐뭇한 웃음’의 예능으로 발돋움할 것 같다. 도전은 치열하지만 아름답고, 꿈은 닳지 않기에 더욱 애틋하다.
신윤재(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