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유수빈의 연기는 언제나 부드럽고 확실하게 상대에게 스며든다. 혼자 튀기보다는 상대의 호흡을 자연스럽게 받아내며 자신만의 색을 남긴다.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다가도 일순간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웃음을 끌어낼 줄 아는 영리한 배우다.
MBC 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에서도 그의 진가가 여실히 드러난다. 이안대군(변우석)과는 끈끈한 브로맨스를, 성희주(아이유)와는 유쾌한 티키타카를, 도혜정(이연)과는 풋풋한 설렘을 빚어낸다. 누구와 붙어도 찰떡같은 호흡을 자랑하는 그는 기어코 이 드라마를 '케미스트리 맛집'으로 완성해 낸다. 극 중 진짜 왕자님은 변우석일지 몰라도, 인물 사이를 유연하게 잇고 매 장면 새로운 온도를 불어넣는 '케미스트리 왕자님'은 단연 유수빈이다.
그중에서도 이안대군과의 관계성은 단연 돋보인다. 궁 안에서는 대군의 위엄을 지켜주려 깍듯하게 굴지만, 둘만 남으면 영락없는 잔소리꾼 절친으로 변신한다. 입술을 삐쭉이며 대군의 말을 퉁명스럽게 따라 하는 모습은 두 사람이 군신(君臣) 관계를 넘어 오랜 세월 함께한 벗임을 단숨에 설득한다. 특히 희주를 지키려 파혼을 선언한 대군에게 "결혼하자 다 해놓고 이건 기만이야"라며 거침없이 팩트 폭력을 날리는 장면은, 그가 대군의 가장 완벽한 안전지대이자 솔직한 거울임을 매력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예기치 않게 얽힌 성희주와는 희극적 재치가 폭발한다. 초반엔 희주를 경계하며 몰래 뒷조사까지 불사하던 그가, 어느새 특별 보좌관이 돼 보여주는 언밸런스한 호흡이 큰 웃음을 안긴다. 액세서리를 대보며 어떠냐고 묻는 희주에게 "쏘 샤이닝!"이라며 호들갑스러운 리액션을 바치고, 인생샷을 건져주겠다며 "아르르르르" 정체불명의 추임새를 넣는 모습은 천연덕스럽기 그지없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두 사람의 찰진 티키타카는 무거워질 수 있는 왕실 이야기에 경쾌한 리듬감을 불어넣으며 쉴 틈 없는 재미를 선사한다.
후반부로 향할수록 시선을 붙잡는 또 다른 관전 요소는 바로 최현에게 불어온 봄바람이다. 성희주의 비서 도혜정을 향한 그의 은근한 관심은, 그간 유수빈이 다양한 작품에서 보여줬던 허당스럽지만 정다운 매력에 핑크빛 설렘을 한 스푼 얹어낸다.
부모님이 꽃집을 운영한다는 사실에 '꽃수저'라는 귀여운 수식어를 붙여주거나, 혜정이 휴지로 고이 접어준 장미꽃의 향기를 몰래 맡아보는 디테일. 다소 어색한 제스처와 힐끗거리는 조심스러운 시선 속에는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 남자의 투명한 속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멋있는 척을 하기보단 서툴러서 더 진심으로 다가오는 유수빈식 로맨스는 보는 이들의 마음마저 몽글몽글하게 만든다.
유수빈의 연기에는 늘 이런 힘이 있었다. '사랑의 불시착', '스타트업', '인간실격', '약한영웅 Class 2', '당신의 맛', '콘크리트마켓' 등에서 그는 언제나 극의 흥미를 이끄는 든든한 조력자였다. 그러나 그는 배경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얄미움과 애잔함, 강포함과 유약함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한 인물 안에 능수능란하게 포개며 짧은 등장만으로도 장면의 결을 바꾸는 배우였다. 그리고 '21세기 대군부인'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인지 다시금 증명해 내고 있다.
그래서 유수빈을 '케미스트리 왕자님'이라는 말로만 설명하기 아깝다. 그는 상대를 빛나게 만들면서 동시에 자신의 색을 남긴다. 변우석과의 브로맨스에서 관계의 깊이를 더하고, 아이유와의 티키타카에서는 텐션을 끌어올리며, 이연과의 로맨스에서는 순수한 설렘을 빚어낸다. 한 인물이 여러 관계 속에서 이렇게 유연하게 기능하려면 배우의 정교한 완급 조절이 중요하다. 유수빈은 상대의 에너지를 받아내고, 되돌려주고, 그 사이에 최현만의 박자를 심는다.
존재감을 부피가 아닌 밀도로 꽉 채워내는 이 러블리한 신스틸러의 다음 스텝이 기다려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