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사랑’, 이창동의 오랜 숙고가 빛을 발하다

정수진(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6.09.22 11:06

23일 극장 개봉 2주 상영 후 11월 6일 넷플릭스 통해 전세계 공개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은 정리해고된 노동자 부부와 그들을 다큐멘터리에 담으려는 감독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계급과 고통, 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영화는 노동과 자본의 구도 속에서 인간의 복합적인 내면과 노동자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긴장감 넘치는 감정의 파도를 그려냈다.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설경구, 전도연, 조여정, 조인성 등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이며 11월 넷플릭스 공개에 앞서 9월 극장에서 상영했다.
사진제공=넷플릭스 

얼핏 어렵다. 정해진 답안이 없기 때문이다. 잘 포장된 길이 아니라 수십 년 세월 동안 자연의 힘으로 형성된 야생의 길을 헤치며 천천히 탐험하는 기분이랄까. 길을 헤치고 나온 이후에도 한참을 길을 되돌아보고, 돌아와서도 길 속에서 본 풍경을 복기하게 된다. ‘버닝’ 이후 8년 만에 돌아온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을 보고 난 첫 소회다.

영화는 SP중공업 용접공으로 일하다 정리해고된 호석(설경구)과 아내 미옥(전도연) 부부와 그들을 자신의 다큐멘터리 영화에 담으려는 감독 예지(조여정)와 그의 남편 상우(조인성) 부부의 이야기를 담는다. 호석은 ‘옥쇄파업’과 강제진압 후유증으로 몸과 마음을 심하게 다쳤으나 심리 상담도 거부한 채 찰랑찰랑한 금세라도 넘칠 듯한 분노와 상실을 담고 있는 인물. 미옥은 호석의 아픔을 이해하고 함께하지만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예지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 호석의 동료 장례식장에서 호석과 미옥 부부를 발견 후 그들과 가까워지려 하고, 투자전문 펀드계의 큰손인 자본가 상우는 예지의 요청에 따라 호석과 미옥 부부를 자신의 별장에 초대한다.

사진제공=넷플릭스 

인물들의 상황 설명만 봐도 나올 수 있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노동과 자본으로 이루어지는 계급의 구도, 타인의 고통과 그를 집요하게 쫓는 예술가의 윤리적 문제, 헤어나기 힘든 상처를 입고 자아가 깨진 인간의 복합적인 고통, 타인이 타인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질문들을 접하며 우리는 새삼스레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다. 인간은 그 어떤 인간도 단순하지 않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 인간들로 구성된 세계는 대단히 복잡한 층위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 ‘노동자’ ‘부자’ 등 노골적이고 단순한 표현으로 쉽게 한 인간을 정의하려는 세태에, ‘가능한 사랑’은 그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깨닫게 만든다.

영화에서 노동과 노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드는 순간은 의미심장하다. 해고 노동자들의 심리 상담 내용을 마치 예지가 찍는 다큐멘터리처럼 오롯이 보여주는데, ‘노동귀족’이 ‘빨갱이’가 되어가는 과정과 정리해고에서 살아남은 ‘산 자’와 해고당한 ‘죽은 자’로 나뉜 이들이 어쩌다 한 공간에서 마주할 때마다 겪는 숨막히는 고통 등을 듣게 된다. 휘황찬란한 휴양지를 만들고도 어디에서도 자취를 찾을 수 없는, 마술사가 마술로 감춰버리는 코끼리 같은 노동자의 상황을 낱낱이 마주하는 이 순간은, 어떤 식으로든 노동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대다수 사람들이 온전히 귀를 열고 듣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사진제공=넷플릭스

표면적으로 ‘가능한 사랑’은 굉장히 잔잔하고 고요하다. 영화 시작 시 나오는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라는 문구와 제목의 ‘사랑’이란 단어를 연결시키면 도파민 터지는 연속극 한 편 뚝딱 상상하게 되지만, 그럴 리가.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정말 잔잔하고 고요하냐고? 이에 대한 대답 역시 그럴 리가. ‘가능한 사랑’엔 온갖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쓸려간다. 드라마틱하게 덮치는 게 아니라 스멀스멀 적시다가 어느새 쾅, 뒤통수를 친다. 그 소요하는 감정들로 인해 내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는 쫄깃한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긴장감 넘치는 온갖 감정들을 온몸으로 내뿜는 배우들이 있기에 ‘가능한 사랑’은 가능해진다. 이미 베니스에서 ‘100년에 한 번 나올 연기’라는 찬사를 받은 전도연의 연기는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평생 노동하며 살아왔으나 해맑은 구석을 읽지 않고, 자본과 계급의 억압에서도 강렬한 자유의지를 잃지 않는 미옥이란 인물은 전도연이기에 가능한 캐릭터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설경구를 유명하게 만든 초기작 ‘박하사탕’의 영호가 떠오르기도 하는 설경구의 호석은 폭발적이다. 유령처럼 부유하다 상처를 절절히 토해내는 순간의 가쁜 호흡은, 관객에게 그 생생한 고통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전율케 한다. 감독의 자아와 고민이 진하게 배어 있는 조여정의 예지는 흥미롭고, 자본가의 양면을 보여주는 조인성의 상우 또한 인상적. ‘호프’의 ‘호포 코르티스’ 뺨치던 힙한 모습이 무색하게, 나이가 들수록 중년의 여유로움이 깃들고 있는 조인성의 모습을 포착해 부유하고 느긋한 자본가를 완성한다.

사진제공=넷플릭스

배우들의 연기와 함께 감독이 심어놓은 메시지와 메타포를 꼭꼭 씹으며 사유해야 할 ‘가능한 사랑’. 지난 12일 폐막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을 거머쥔 ‘가능한 사랑’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영화인 만큼, 11월 6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된다. 그 이전 추석 시즌인 9월 23일 극장에서 2주간 관객을 맞이할 예정이니, 큰 화면으로 이창동의 사유와 베테랑 배우들의 열연을 감상하려면 이 기간을 놓치지 말 것. 러닝타임은 164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다.

정수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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