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차시장의 갑을 관계가 역전됐다. 전세매물은 쌓여가는데 입주 물량까지 많아지면서 집주인과 세입자간 입장이 달라졌다. 불과 2년 전 '임대차2법'(계약갱신청구권, 전·월세 상한제) 등 임차인 주거권 보호에 집중한 대책이 쏟아지던 상황과 정반대다.
14일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전국 아파트 전세수급지수는 86.7을 기록했다. 이는 3년 전인 2019년 10월 14일(86.8)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전세수급지수는 100을 기준으로 0에 가까울 수록 전세매물이 많은 '공급우위', 200에 가까우면 그 반대인 '수요우위'를 의미한다. 전세시장은 지난해 12월 13일(100.3) 이후로는 줄곧 공급이 수요를 웃도는 상황이다.
전세 매물은 빠르게 쌓이고 있다. 부동산 빅데이터 업체 아실에 따르면 전국 아파트 전세 매물은 18만5754건으로 1년 전(9만1421건)보다 두 배(103.1%) 이상 늘었다. 1개월 전(15만3520건)과 비교해도 20% 이상 증가했다. 서울은 1년 전(2만5739건)보다 73.4% 늘어난 4만4638건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경기는 2만5467건에서 6만687건으로 138.2% 불어났다.
앞으로 예정된 입주물량을 고려하면 전세 매물의 적체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입주예정물량은 경기 지역 약 8만가구를 포함해 올해 하반기에만 전국 20만가구 이상 잡혀있다.
◆전세 매물 쌓이고, 전셋값 '뚝뚝'…집주인, 이사비·인테리어·명품 가방 등 추가조건 내걸어
세입자들의 무기였던 계약갱신청구권은 이제 다른 선택지가 많아지면서 사용할 필요조차 없어졌다. 반면 전셋값이 크게 올랐을 당시 계약한 집주인들은 절박해졌다. 보증금을 안 올리고 계속 살아달라고 호소해야할 판이다. 특히 높은 전세가격에 기대 '갭투자'를 했던 집주인들은 세입자에게 보증금의 일부를 돌려줘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재건축 최대어로 꼽히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전용 76㎡는 현재 6억3000만원짜리 전세 물건이 나왔다. 2년 전 최고가(9억원) 대비 2억7000만원 가격이 내려갔다. 강북권 대단지인 마포구 아현동 마포래미안푸르지오 전용 84㎡는 이달 5일 7억7500만원에 전세계약이 체결됐다. 2년 전에는 10억원에도 전세 계약이 이뤄졌다.
급매물에 이은 '급전세'도 늘었다. 집주인들은 세입자를 붙잡기 위해 보증금 인하부터 이사비용 지원, 인테리어 등 다양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이달 5일 충남 천안의 한 아파트 전용 84㎡ 집주인은 전세 계약을 하면 샤넬 가방을 증정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어 화제가 됐다. 이 단지 같은 면적은 최근 3억4000만원에 전세계약이 성사됐다. 지난해 8월 4억5000만원보다 1억원 이상 내려간 금액이다.
한국공인중개사협회 소속 한 공인중개사는 "서울뿐 아니라 지방 대도시권에서도 전세시장은 완전히 세입자 중심으로 흘러가면서 전세 매물이 쌓이고 있다"며 "특히 새 아파트 입주가 예정된 곳들은 앞으로 세입자를 구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④보증보험 미가입 900만가구 '사각지대'
#서울 강서구 마곡에 원룸오피스텔을 분양받아 7년째 보유해온 직장인 A. 등록임대사업자 갱신 시기를 놓쳐 오피스텔이 주택수에 포함되면서 종부세를 내게 됐다. 울며 겨자먹기로 9년 전 분양가에 1000만원을 더해 급매로 내놓고 전세를 맞췄다. 그제야 사겠단 이가 나타났지만 이번엔 세입자의 반대에 부딪혔다. 전세 계약 시 추후 매도를 진행하겠다고 사전양해를 구했지만 막상 매수자가 나타나자 '깡통전세'를 우려해 반발하고 나선 것.
주택 매매와 전세 시세가 나란히 하락곡선을 그리면서 잠 못자는 집주인이 늘고 있다. 팔고싶어도 매수자가 나서지 않고 어렵게 매수자를 구해도 세입자 눈치를 봐야한다. 전세가율이 높은 것으로 공개된 지역의 임대인들은 잠재적 '전세사기범'이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까지 받는다. 매매와 전세 시세가 동시 급락하는 시장에선 '착한 임대인' 조차 보증금 전액을 돌려주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의적 전세사기(검찰청 검찰 송치건수)는 2019년 107건에서 이듬해 97건으로 줄었다가 지난해 다시 187건으로 배로 늘었다. 반면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보증사고액은 2019년 3442억원에서 이듬해 4682억원, 2021년에는 5790억원으로 꾸준히 늘었다. 전세사기 추이와 무관하게 보증사고는 늘고 있는 것이다.
전세를 끼고 주택을 매수한 임대인들은 금리 급등으로 매수세가 얼어붙어 팔고 싶어도 매도가 여의치 않다. 결국 전셋값 하락분 만큼 추가 자금을 변통해야 임차인에게 보증금 전액을 온전히 돌려줄 수 있다. 하지만 DSR(총대출원리금상환비율)에 묶여 전세퇴거자금 대출도 여의치 않다. 규제지역이나 다주택 여부를 따지지 않고 전세퇴거자금대출을 받으려면 대부금융권 외 대안이 없다. 이 때문에 임대인들은 전세금반환대출 규제를 풀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정부가 지난 9월 1일 '임차인 재산보호와 주거안정 지원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지만 하지만 전세 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아예 모든 임차인에게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가입을 의무화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재는 등록 임대주택 160만 가구만 의무 가입 대상이다. 나머지 전월세주택 900만가구는 집값 하락과 역전세가 동반 심화될 경우 임차인 보호의 사각지대가 될 수 있다.
송인호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정보센터 소장은 "정부가 인위적으로 전셋값을 조정할 순 없으니 손에 쥔 카드가 많지 않다"며 "세입자들이 보증보험에 최대한 가입하도록 유도하는게 최선"이라고 했다.
관련 입법 움직임도 있다. 지난해 5월 소병훈 의원이 대표발의한 '주택임대차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은 보증금 3억원 이하 임차주택의 경우 임대인과 임차인이 의무적으로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에 가입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HUG에 접수된 보증사고 중 약 90%가 전세보증금 3억원 이하의 주택들이다. 하지만 해당 법안은 본회의 심의도 이뤄지지 못했다.
국토부는 신중하다. 원희룡 장관은 최근 국감에서 "무리한 갭투자로 발생한 '깡통전세'까지 구제책을 마련하지 않겠다"는 입장 밝힌 바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전셋값이 (단기에) 올랐기 때문에 조정국면에서 어느 정도 혼돈은 불가피하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라며 "세입자들이 당장 활용할 수 있는 보증보험 이외에 추가 대책을 거론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