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 614억 횡령범의 '완전범죄' 미몽(迷夢)

오상헌 기자
2022.05.10 05:42

[우리가 보는 세상]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우리은행 직원의 614억원 횡령 사건은 여러모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렇게 큰 돈을 10년 간 감쪽같이 빼돌렸다는 점도 그렇거니와 현직 은행원이 전액 인출 후 4년이나 도주하지 않은 것도 이례적이다. 횡령액은 공공기관(캠코)과 여러 은행으로 구성된 채권단이 2010년 옛 대우일렉트로닉스 매각 과정에서 이란 기업(엔텍합)으로부터 몰취한 계약보증금(원금+이자)이었다. 언젠가 돌려줘야 할 공금이었는데도 실무 자금 관리자인 A씨 외에 누구도 계좌를 들여다보지 않은 건 상식 밖의 일이다.

이런 '간 큰 범죄'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돈의 성격과 범죄 과정의 전말을 보면 짐작 가는 게 없지 않다. A씨가 돈을 빼돌린 2012~2018년 전후의 시계를 되돌리면 명확해 보이는 게 한 가지 있다. 유일하게 모든 상황을 통제했던 A씨가 '완전범죄'에 완전히 도취해 있었다는 추정 말이다. "이란 제재 해제와 계약금 송금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일종의 자기 확신이 있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언젠간 들통날 것이란 두려움과 공포, 심적 부담이 컸더라면 체포 당일까지도 버젓이 출근해 유능한 구조조정 전문가 행세를 이어가지는 못 했을 테니 말이다.

여러 정황도 이런 심증을 뒷받침한다. A씨가 세 차례 돈을 빼낸 때는 공교롭게도 대우일렉 관련 '대형 이벤트'가 발생한 직후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알리바이를 적극 활용했다는 뜻이다. 첫 횡령일(2012년 10월12일)은 대우일렉이 해외 한 거래기업(이란 파슨사)과 소송에서 패소해 국내 기업에 대우일렉을 넘기려던 재매각 작업이 다시 좌초된 바로 직후였다. A씨는 소송 공탁금으로 쓰겠다고 속여 문서를 위조한 뒤 173억원을 수표로 빼갔다. 두 번째 횡령 시점도 이란 기업이 계약금을 반환하라며 낸 국제 중재소송 사실이 국내에 알려진 바로 며칠 뒤(2015년 9월25일)다. 이번엔 신탁 예치금 명목으로 148억원을 수표로 찾아 횡령했다. 1차 범죄 후 3년 간 아무 일도 없었으니 2차 횡령도 거저라 생각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돈을 다 털어간 때(2018년 6월11일)도 계약금 반환 중재 판정이 내려진 바로 직후다. 계약금 관리 주체가 캠코로 변경된다는 거짓 문서로 결재를 받아 친동생 명의의 유령회사(특수목적법인·SPC) 계좌로 293억원을 모조리 이체했다. 계약금 반환 판정이 나왔는데도 더 진화한 수법으로 횡령의 대미를 장식한 셈인데 A씨가 수년간 직간접적으로 이란 문제에 관여하면서 지켜본 당시의 국제 정세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한 달 전인 2018년 5월 미국의 이란 핵합의 파기로 미-이란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은 상황 말이다. 미국의 대이란 제재와 최대 압박에 계약금을 송금할 일이 가까운 미래엔 없다는 나름의 판단이 무모한 범죄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아쉬운 점은 은행을 포함해 정부와 공기업 등 많은 이해관계자들이 하나같이 남 일처럼 손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란 문제의 민감성을 모티브로 완전범죄의 미몽에 빠진 횡령범의 탐욕과 이기심에 모두의 무관심과 무책임이 버무려진 참극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공유지의 비극'이라 할 만하다. 사건의 전말을 차분히 되짚어 봐야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걸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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