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아이디어만 있으면 창업'의 불편한 진실

최태범 기자
2026.06.08 18:00

"아이디어를 한 줄만 적어낸 지원서도 있었다."

정부의 창업 장려 정책인 '모두의 창업' 지원서를 심사한 AC(액셀러레이터) 관계자의 말이다.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실제 심사 현장에서는 A4 반 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신청서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수백 건을 검토해도 투자검토 단계까지 갈 수 있는 사례는 손에 꼽는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창업의 문턱을 낮추겠다는 정책 취지는 이해할 만하다. 창업이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선택지가 돼야 한다는 방향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다. 문제는 과정에서 전달된 메시지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된다'는 구호가 창업을 지나치게 가볍게 인식하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 현장에서 나온다.

벤처투자 시장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달라졌다. 과거에는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만으로도 투자를 유치하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투자자들은 기술력과 시장 검증, 창업팀의 실행 역량을 먼저 본다. 좋은 아이디어는 출발점일 뿐이며, 그것만으로 투자와 성장을 담보할 수는 없다.

투자업계의 시선은 더욱 냉정하다. 한 VC(벤처캐피털) 심사역은 정부가 소상공인 지원 정책과 스타트업 육성 정책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생계형 창업 확대와 기술 기반 스타트업 육성은 출발점도 목표도 다르다. 그런데 정책 설계 과정에서 이 둘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창업이 처음부터 완성된 사업계획서를 갖춰야 하는 것은 아니다. 창업 문턱을 낮추고 도전 문화를 확산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하지만 수백 수천 개의 실패 사례 뒤에 한 개의 성공 사례가 나오는 것 또한 창업의 냉혹한 현실이라는 것을 외면해선 안 된다.

창업은 누구나 꿈꿀 수 있지만 모두가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정책의 역할은 도전을 독려하는 데 그치지 않아야 한다. 도전이 성과로 이어지는 사다리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창업의 현실을 정확히 알리고 준비된 도전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창업 생태계가 진짜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신청서가 아니다. 더 많은 창업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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