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를 넘어 녹색 미래로.' 최근 대통령 주재로 열린 한국형 녹색대전환(K-GX) 전략 발표 현장의 무대에 걸린 문장이다. 경제부총리는 2035년까지 재정 200조원과 기후금융 790조원 등 1000조원 규모의 재원을 녹색전환에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어 철강·태양전지·가전 기업의 대표들이 차례로 단상에 올라 민간 220조원이 들어가는 10대 시그니처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그 발표를 들으며,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산업이 스스로 다음 세대로 건너가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을 보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다만 그 자리에 앉은 기후테크 스타트업 투자자로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 거대한 설계도 안에서 혁신기업의 자리가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후테크 스타트업은 기술이 없어서 멈추지 않는다. 첫 고객과 첫 실증 현장, 그리고 장기 자본이 없어서 멈춘다. 실험실에서 검증된 기술도 실제 공장에서 돌려보지 못하면 팔 수 없고, 팔아본 적 없는 기술에는 누구도 돈을 대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K-GX는 이 문제를 풀 가장 좋은 기회다. 공정을 바꿔야 하는 철강·석유화학·시멘트·반도체 공장이야말로 혁신기술의 가장 큰 수요처이자 실증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 번째 제안은 10대 시그니처 프로젝트마다 '오픈 실증 트랙'을 붙이자는 것이다. 대기업은 전환 현장의 일부를 스타트업 혁신기술의 시험장으로 열고, 정부는 실증 비용과 실패 부담을 나누며, 검증을 통과한 제품은 혁신제품 시범구매 같은 공공조달로 먼저 사 준다. 실증 결과는 표준화된 데이터로 남겨 다른 수요기업과 투자자도 함께 쓰게 하면 대기업은 전환 속도를, 스타트업은 첫 레퍼런스를 얻는다. 220조원 프로젝트가 몇몇 대기업의 설비투자 계획에 그치지 않고 산업 생태계 전체의 전환이 되는 길이다.
두 번째 제안은 1000조원을 움직일 컨트롤타워다. 이번 재원은 여러 부처의 예산과 다섯 개 정책금융기관의 공급 목표로 나뉘어 있고, 주로 대출과 보증의 형태다. 성장 단계 기업에는 든든한 버팀목이지만, 아직 검증 전인 기술에는 첫 위험을 함께 지는 지분투자 중심의 자본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위험을 책임지고 10년 넘게 기다려 줄 주체가 없다. 재원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그 돈이 누구의 시간표로 움직이느냐다. 대출은 상환 일정을, 펀드는 청산 일정을 따른다. 기술의 시간표를 따르는 돈은 아직 없다.
그래서 '기후에너지투자공사'와 같은 공적 투자기구가 필요하다. 1000조원 가운데 1%만 장기 지분투자로 돌려도 10조원이다. 이 기구가 해야 할 일은 세 가지다. 첫째, 정책금융과 민간자본 사이에서 첫 위험을 떠안는 앵커투자자가 된다. 둘째, 실증을 통과한 기업이 다음 단계 자본을 만나도록 오픈 실증 트랙과 투자를 하나로 잇는다. 셋째, 흩어진 재원이 어디로 흘러 얼마만큼의 감축과 산업 성과를 냈는지 한곳에서 관리한다. 이 역할이 갖춰질 때 K-GX는 계획에서 시장으로 넘어갈 수 있다. 영국의 국가자산펀드, 호주의 청정에너지금융공사처럼 주요국은 이미 이런 기구를 두고 있다. 무엇보다 민관 거버넌스로 정책 불확실성을 걷어 줄 때 민간자본은 비로소 안심하고 들어온다.
기후테크는 실패 확률이 높은 산업이다. 100개에 투자하면 대부분은 사라진다. 그러나 그중 한두 개가 성공하면 산업의 판이 바뀐다. 그 한두 개를 만들어 내는 힘은 정부가 승자를 미리 고르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많은 기업이 현장에서 시험받고, 살아남은 기업에 끝까지 기다려 주는 자본이 붙는 구조에서 나온다. 오늘 단상에 오른 것은 대기업이었다. 몇 년 뒤 같은 자리에 스타트업이 함께 서 있으려면, 1000조원이 그들에게 닿도록 첫 무대와 기다려 줄 자본을 지금 설계해야 한다. 그때 K-GX는 감축 전략을 넘어 대한민국의 다음 성장 엔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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