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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벤처투자 시장이 정책자금 확대에 힘입어 양적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자본이 실질적인 혁신으로 이어지려면 연대보증 중심의 은행식 금융에서 벗어나 투자자와 창업자가 권한과 책임을 나누는 '거버넌스'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박희덕 트랜스링크인베스트먼트 대표는 27일 서울 마포구 공덕 프론트원에서 열린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한국경제학회 공동 '기술사업화 폴리시 코-랩'(Policy Co-Lab)에서 "제도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질적 변화 없이 양적 팽창만 거듭하고 있다"며 "자금을 씨앗이라고 보면 토양이 준비되지 않은 자갈밭에 씨앗을 계속 뿌리는 격"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경제 3강 도약을 위한 혁신자본 대전환: 자본의 속성을 깨워 성장의 임계치를 넘다'를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에서 박 대표는 '연대보증에서 거버넌스 책임으로의 전환: 뱅킹(Banking)에서 인베스트먼트(Investment)로'을 주제로 첫 발제에 나섰다.
정책자금은 늘었지만…여전히 은행식 금융에 갇힌 벤처투자
박 대표는 먼저 국내 투자금융생태계가 은행식 금융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최근 금융위원회 자문 과정에서 보니 창업투자회사는 입법을 통해 연대보증이 사라졌지만, 신기술금융사업자와 자산운용사, 은행 등에는 여전히 연대보증 문제가 남아 있었다"며 "투자금융생태계가 아직 연결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30년이 지났지만, 대부분이 여전히 '뱅킹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책자금은 이미 상당한 규모로 확대됐다. 박 대표는 "150조원 국민성장펀드, 13조5000억원 넥스트 유니콘, 연간 벤처투자 40조원 목표 등 현실적인 숫자인가 싶을 정도로 큰돈이 집행되고 있다"면서도 "시장의 플레이어는 많아지는데 이들이 운영하는 법칙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자금 공급을 늘리는 데 집중할 뿐, 투자자와 창업자가 어떤 원칙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고 결과에 책임질 것인지는 충분히 논의되지 않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국내 스타트업의 성장 곡선과 상장 이후 행태에서도 구조적 한계가 드러난다고 봤다. 박 대표는 실리콘밸리 스타트업과 국내 스타트업의 기업가치 곡선을 비교하면 국내 기업은 성장 단계에서 상승세가 꺾여 실패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설명이다. 그는 "코스닥 상장 후 매각 대상으로 전락하는 기업이 적지 않다"며 "이를 창업자나 투자자의 도덕적 해이로만 볼 게 아니라 실행과 책임 구조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국내 유니콘 기업에도 주주간담회는 있지만, 이사회가 책임지고 의사결정을 내리고 대표이사가 이를 집행하는 체계는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문제의 배경에는 은행식 금융과 투자금융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제도와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게 박 대표의 주장이다. 은행이 원금과 이자 회수, 담보·보증, 상환능력을 중심으로 '누가 갚을 것인가'를 묻는다면, 투자자는 미래가치와 지분을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감수하며 '누가 어떤 권한을 갖고 무엇에 책임질 것인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은행은 오늘의 실적과 담보를 평가해 현재의 안정성을 보지만, 투자자는 10년 후 시장을 평가해 미래의 안정성에 베팅한다"며 "연대보증의 축소·폐지는 책임의 폐지가 아니라 새로운 책임 구조인 '투자 거버넌스'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VC는 자금관리자가 아닌 '실행 파트너'…권한과 책임 연결해야
박 대표는 벤처캐피털(VC)의 역할부터 재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리콘밸리의 VC는 단순한 '자금 공급자'가 아니라 인재 채용, 고객 연결, 시장진입(GTM) 전략 수립, 글로벌 파트너 발굴까지 지원하는 '실행 파트너'라는 설명이다. 그는 "VC의 본질은 인재·고객·후속투자·글로벌 시장을 연결하는 신뢰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라며 "가장 중요한 자산은 자본이 아니라 신뢰"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벤처생태계의 계약과 의사결정 구조가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창업자와 VC 사이의 투자계약, VC(GP)와 출자자(LP) 사이의 조합규약(LPA)이 각각 벤처생태계의 운영체제(OS) 역할을 하지만, 국내에서는 두 구조가 제대로 맞물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실리콘밸리는 GP를 혁신의 실행 파트너로 보지만, 한국은 자금관리운용사로 본다"며 "이러한 인식 차이가 생태계의 구조와 성과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글로벌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서도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대표는 2000년대 초 세쿼이아캐피탈의 중국 진출 사례를 들며 "중국은 제도를 바꿔 달러 기반 투자사가 안심하고 투자하고 회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도 AI·로봇 시대에 그런 기회를 맞았지만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글로벌 대형 VC가 들어왔다가도 다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사업 실패는 감수하되 거버넌스 실패에는 책임 물어야
박 대표는 대안으로 창업자와 VC·GP, LP가 각자의 권한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는 '신뢰 거버넌스'를 제시했다. 창업자는 경영과 사업 실행, VC·GP는 투자 판단과 기업가치 창출, LP는 운용사 선정과 자본 배분을 각각 책임지는 구조다.
특히, 사업 실패와 거버넌스 실패를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장이나 기술, 제품의 한계로 사업이 실패하는 것은 투자 과정에서 감수해야 할 위험이지만, 허위보고와 정보 은폐, 이해상충 등은 별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업 실패는 투자가 감수해야 할 리스크이고, 거버넌스 실패에는 명확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실패에 대한 관용과 책임성을 함께 높여야 실패를 자산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한 제도 개선 과제로는 △VC와 기업 간 투자계약 개선 △LP와 VC 간 출자 구조 정비 △정부의 규제·평가 방식 전환을 제시했다. 구체적으로는 정부금융기관의 역할 재정립, 범부처 통합 태스크포스(TF) 구성, 기업의 경영 거버넌스 확보, 투자금융과 상장금융의 연계 등을 주문했다. 투자계약 역시 실패 시 책임을 묻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가치를 함께 만들어가는 신뢰 기반의 계약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 대표는 "혁신은 더 이상 기술과 자본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며 "AI 시대의 혁신은 기술과 자본에 신뢰, 실행력, 보상, 네트워크가 더해져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실리콘밸리의 경쟁력은 바로 이 거버넌스 신뢰 네트워크에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