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승정원일기와 '헬조선'

오승주 기자
2017.01.04 05:30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을해년 7월 초파일 진시, 임금이 성정각에 머물렀다'(정조 3년 음력 7월8일 오전 7시). '을유년 10월 초육일 유시, 임금이 수원행궁에 있었다'(정조 13년 10월6일 오후 6시).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승정원일기'(국보 303호)는 글자 수만 2억 4250만자(3243책)다.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광해군 시절까지 일기는 소실돼 인조 원년(1623년)부터 순종 4년(1910년)까지 288년 어치 기록만 남아있다. 그래도 세계 최대의 기록유산이다. 일기가 사라지지 않고 조선왕조(518년) 기간만큼 남아 있었다면 최소 5억자는 넘을 것으로 학계는 추산한다.

2001년 시작된 한자 원문의 데이터베이스(DB) 작업은 15년이 흐른 2015년 말에야 끝났다. 한글 번역은 현재 전체의 20% 가량 진행됐는데 전체 번역이 완성되려면 최소 50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승정원일기는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 격인 승정원에서 날마다 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남긴 사료다. 한국학의 대가 최준식 교수(이화여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의 설명에 따르면 승정원일기는 왕의 움직임이나 기분까지도 상세하게 적었다. 영조가 일이 많은 것을 한탄하며 '이렇게 일 때문에 골치를 썩는 게 내 팔자'라는 탄식까지 기록했다.

특징적인 대목은 언제나 왕이 머문 장소를 가장 먼저 적었다는 것이다. 창덕궁과 경희궁 등 그날 임금이 머문 궁궐은 물론 규장각과 성정각을 비롯한 궁궐내 전각, 화성·여주 지방 행궁 등 임금의 발자국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시시각각 왕이 거처를 옮길 때마다 상재(上在)로 시작하는 '위치파악'은 임금의 입장에서는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어 보일지 몰라도 당대 비서실로서는 '기본 중의 기본'으로 판단했다. 왕의 동선에는 시간까지 드러내며 도승지를 비롯한 승정원 관료 몇 명이 보좌했다는 것까지 소상히 밝히고 있다.

최근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 논란'은 조선 시대 사관의 눈에는 이해하기 힘든 일로 비춰질 법 하다. 비서실이 최고 통치자를 오후 2시에 처음 봤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조선시대 승정원 입장에서는 아연실색할 직무유기 중 직무유기였다.

임금의 의료처방도 꼼꼼히 적시하고 있다. 몸이 약한 경종은 종기로 고생했는데, 경종 3년(1723년) 음력 8월4일에는 종기 치료를 위해 오전 8시에 도제조 최석항 등 의료진 12명이 창덕궁 희정당에 모여 증세를 문진하고 처방을 내리는 기록이 상세하게 서술돼 있다. 조선시대 관점에서 보면 논란이 되는 '몰래 진료'는 꿈도 꿀수 없는 셈이다.

현대인들이 자조적으로 비아냥거리는 '헬조선'도 기록에서만큼은 이랬다. 최고 통치자에게 숨 막히는 기록의 잣대를 들이민 것은 행동 하나하나를 경계하라는 요구였다. 기록이 통치자에게는 족쇄로 여겨지겠지만, 역사에 남는다는 압박 때문에 적어도 '모른다' '억울하다'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새롭게 들어서는 정권에는 승정원을 설치하는 게 어떨까. 공인 중의 공인으로 꼽히는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후대에 전하고, 국민에 대한 두려움을 기록으로 깨우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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