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겨우내 움츠렸던 어깨가 슬쩍 펴지고 세상은 땅속에서부터 묘하게 들썩이기 시작한다. 아직 아침저녁으로 바람 끝은 차갑지만, 어느 날 오후 문득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또 바람의 숨결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반가운 햇살 뒤로, 마음 한편엔 서툰 발걸음들이 서성인다. 새 학년, 새 부서, 저마다의 이름으로 시작되는 이 계절은 설렘과 긴장이 아슬아슬하게 공존하곤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무언가를 끊임없이 증명해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압박이 문득, 숨을 턱 막히게 하는 순간도 찾아올 것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응원이 아니다. 그저 봄 햇살처럼 가볍고 따스하게 어깨를 감싸주는, 작고 섬세한 다정함이면 충분하다. 이 계절, 스무살 성인이 되어있는 자녀에게 부모님의 응원이 담긴 마음에 꼭 드는 와인을 추천한다.
레드 와인의 단단한 구조감과 화이트 와인의 순수한 향기를 모두 품은 이 오렌지 와인이야말로, 아이와 어른 그 경계에서 자신만의 색을 찾아가는 우리 아이들을 가장 닮아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Campania)가 원산지인 고대 품종 팔랑기나 품종은, 캘리포니아의 석회암 토양에서 새롭게 태어나 오렌지 와인으로 빚어졌다.
오렌지 와인은 종종 오해를 받는다. 레드도 화이트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사실 오렌지 와인이야말로 가장 계절을 잘 이해하는 와인이다. 봄처럼, 뚜렷한 색을 강요하지 않고 그 경계 어딘가에서 가장 아름다운 균형을 찾아낸다. 잔 속에 담긴 황금빛 호박색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굳었던 마음의 긴장이 스르르 녹아 내린다. 이 와인은 당신에게 그렇게 조심스럽게 새내기들의 봄을 알린다.
◆ 캘리포니아의 숨겨진 보물, 산베니토 카운티(San Benito County)
캘리포니아 산베니토 카운티는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보물 같은 산지다. 실레토 패밀리 빈야즈(Siletto Family Vineyards)는 이 지역에서 40여 년간 포도를 재배해 온 터줏대감으로, 트레스 피노스 크릭(Tres Pinos Creek) 주변의 지진으로 형성된 자갈 토양에서 유기농으로 25가지 이상의 품종을 재배하고 있다.
칼레리 빈야드(Calleri Vineyard)는 산베니토 카운티에 위치한 30에이커 규모의 평지 충적 포도밭으로, 깊고 배수가 잘 되는 자갈 토양을 가진 유기농 인증 포도밭이다. Donkey & Goat Winery 몬테레이 베이의 냉기가 내륙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 독특한 기후 환경에서, 팔랑기나는 이탈리아 본토에서와는 또 다른 개성을 뽐낸다.
◆ 고대 품종이 새롭게 태어나다, 팔랑기나(Falanghina) 오렌지 와인
팔랑기나는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역이 원산지인 고대 청포도 품종으로, 쓴 오렌지를 연상시키는 시트러스 꽃향기로 유명하다. 입 안에서는 사과와 배의 풍미가 펼쳐지며, 품종이 자라는 토양에 따라 스파이시와 미네랄리티한 뉘앙스가 더해진다.
이 오래된 품종이 오렌지 와인으로 빚어질 때, 산베니토 카운티의 칼레리 빈야드에서 자란 25년 이상의 올드 바인 팔랑기나는 천연 효모로 발효되며, 껍질과 함께 침용(skin contact)한 뒤 풍미를 보호하기 위해 새오크통을 사용하지않고 중성 오크통(Neutral Oak)에서 11개월간 숙성된다. 카모마일, 꿀, 건살구, 감, 모과의 향이 특징적이다.
◆ 산베니토 아드와 팔랑기나 오렌지 와인 22 (SanBenito Adroit Falanghina Skin Contact 22)
-Region: USA / California
-Vineyard: San Benito County
-Winery: Adroit
-Grape: Falanghina 100%
-Farming: Certified Organic
-Winemaking: Native yeast, Skin contact, Unfined & Unfiltered
-Alcohol: 12.6%
◆ Seabold Cellars/ Adroît 와이너리 이야기
뉴올리언스의 어느 레스토랑 주방, 열두 살 소년이 처음으로 앞치마를 둘렀다. 어머니의 식당이었다. 그 시절엔 몰랐다 그 주방이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결정할 것이라는 사실을.
소년은 자랐고, 워싱턴 여행 중 마신 와인 한 잔에 방향이 바뀌었다. 짐을 싸 시애틀로 향했고, 전설적인 레스토랑 Canlis의 소믈리에 자리를 꿰찼다. 왈라왈라 밸리(Walla Walla Valley)의 포도밭에서 흙을 밟으며 손으로 와인을 배웠다. 세계 최우수 젊은 소믈리에, 미국 최우수 신인 소믈리에 타이틀이 따라붙었고, Wolfgang Puck의 Spago Beverly Hills에서 Wine Spectator Grand Award까지 거머쥐었다. New York Times, Wall Street Journal이 그의 이름을 받아 적었다.
25년이 흘렀다. 마스터 소믈리에 Chris Miller는 마침내 정장을 벗고 청바지를 입었다.2014년, 친구의 셀러 한 켠에 배럴 몇 개를 빌려 시작한 것이 Seabold Cellars의 출발이었다. 2017년 와이너리를 직접 인수했고, 캘리포니아 작은 마을 Marina에 둥지를 틀었다. 몬테레이, 산 베니토, 산타크루즈 세 산지의 정중앙의 셀러보다 포도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는 와인 메이커에게 이보다 완벽한 자리는 없었다.
그의 철학은 간단했다. 와인보다 땅이 먼저 말해야 한다. 그 철학의 끝에서 태어난 것이 부 레이블 Adroît다. 캘리포니아가 외면해온 품종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산지들을 찾아 담는 탐험 일지. 그중 하나가 산 베니토 카운티 Calleri Vineyard의 석회암 위에서 자란 팔랑기나다.
캘리포니아의 과소평가된 산지와 품종을 탐구하는 것을 미션으로 삼고, 비개입주의(non-interventionist) 양조 철학을 고수한다. 마스터 소믈리에가 직접 만드는 극소량 생산 와인으로 가성비 대비 완성도가 높다.
◆ 와인 특징
-고대 품종의 순수한 언어: 수천 년의 역사를 품은 팔랑기나가 산베니토의 석회질 토양과 만나 만들어내는, 가공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향기. 내추럴 유기농법으로 재배된 25년 이상 고수령 포도나무에서 수확.
-드라이하면서도 풍성한 과실미와 탄닌감의 조화, 말린 살구, 감, 퀜스(모과류), 꿀, 그리고 캐모마일의 복합적인 향이 특징이다. 껍질 발효 덕분에 가벼운 탄닌감과 짭조름한 미네랄 리티가 느껴짐.
-양조 방식: 손 수확 & 핸드 소팅(포도를 손으로 수확하고 선별) -> 풋스텀핑(Foot stomping)발로 직접 포도를 으깸(전통 방식) ->스킨 콘택트 4주<껍질과 함께 4주간 발효(오렌지 와인의 핵심)> -> 네이티브 이스트(야생 효모로 자연 발효) -> Gentle pressing( 부드럽게 압착) -> 오크통 11개월/Fine lees(오크 영향 최소화) -> Unfined & Unfiltered (청징·여과 無, 자연 그대로 보틀링).
◆ 테이스팅 노트
-외관(Appearance): 맑고 투명한 황금 호박색. 스킨 컨택이 빚어낸 깊이 있는 색조.
-향(Nose): 1차 향은 파인애플, 멜론, 건 살구의 과실 향에 오렌지 꽃잎과 케모마일의 섬세한 화사함이 교차한다. 2차 향: 꿀과 모과의 부드럽고 달콤한 향, 은은한 허브 향. 3차 향: 버터리한 향과 산베니토 석회암 자갈 토양이 빚어낸 미네랄리티의 깨끗하고 긴 여운.
-팔렛 (Palate): 첫 인상은 예상치 못한 질감으로 시작된다. 파인애플과 레몬껍질의 과실미가 입안 가득 퍼지며, 스킨 컨택에서 비롯된 섬세한 탄닌감이 뒤따른다. 산도는 봄바람처럼 상쾌하고 팽팽하며, 토스트한 아몬드와 화이트 페퍼의 여운이 길게 이어진다.
-결론 (Conclusion): 오렌지 와인에 대한 모든 편견을 우아하게 무너뜨리는 와인.
황금빛을 띠는 약간 탁한 듯 이 와인은 청 사과꽃과 정원의 허브, 아몬드, 미네랄리티한 젖은 돌 향의 광물 향이 어우러진 매우 독특한 아로마가 입안에서는 풋과일 풍미가 느껴지며, 기분 좋은 탄닌이 신기할 정도로 부드럽게 목 넘김으로 이어짐.
봄이 시작되는 3월, 한 잔의 산베니토 팔랑기나는 새 계절을 맞이하는 당신에게 가장 근사하고 특별한 첫 인사가 된다.
◆ 푸드 페어링 (Food Pairing)
-봄 페어링: 봄나물 비빔밥, 두릅 튀김, 냉이된장국, 딸기를 곁들인 치즈 플레이트, 미나리 문어 숙회, 해산물 파스타.
-데일리 페어링: 닭고기 샐러드, 새우 요리, 리코타 치즈 토마토 샐러드
-비건 페어링: 봄나물 두부 샐러드, 구운 아스파라거스와 레몬 드레싱, 딸기와 견과류를 곁들인 루꼴라 샐러드, 허브를 넣은 아보카도 비건 토스트
-혼술 페어링: 홍가리비탕 한 접시나 견과류를 곁들인 치즈 플레이트.
이 와인을 한 모금 머금는 순간, 새로운 땅에서 자신만의 색을 찾아낸 팔랑기나처럼 이 봄 굳이 특별한 날을 기다리지 않아도 좋다. 주말 오후, 봄 햇살이 창문을 두드리는 나른한 그 순간, 조용히 잔을 꺼내 이 천사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 보자. 새로운 봄은 이미 당신 앞에 와 있다. 조용히 와인 잔을 꺼내 응원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 산베니토의 상큼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마지막으로, 필자는 레이블 중앙 하단에 새겨진 한 문장이 유독 마음에 남는다. 와인 메이커의 철학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그 문구가 어쩐지 필자가 지향해 온 인생지론처럼 느껴졌고,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도 오래도록 깊은 여운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적어본다.
"I try all things. I achieve what I can."(나는 모든 것을 시도해 본다. 그리고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을 이루어낸다.)
[에필로그] 2026년부터 '이럴 때 이 와인 어때?'가 새로운 모습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왔습니다. 교과서 같은 정보보다는 매 순간 스치는 감정과 처한 상황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와인들을 세밀하게 골라 전하려 합니다. 앞으로도 여러분의 곁에서 따뜻한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박영신 와인 칼럼니스트-
"껍질째 견뎌낸 시간만이 찬란한 금빛을 만들듯, 새로운 출발 앞에 선 당신도 스스로를 믿고 기다려낸 만큼 깊어지고, 그 깊이만큼 단단해질 것이다."
현(現) 한국와인소비자협회 회장. 경희대학교 와인 소믈리에 석사 및 조리외식경영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며 학문적 기틀을 다졌다. 와인 전문바와 와인 전문숍 운영 등 유통 현장의 실무를 두루 섭렵하여, 현장에서 와인 소비자의 니즈를 가장 예리하게 읽어내는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다. 소비자 행동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등재하고 국내 유수 와인 대회의 심사위원을 역임하며 공신력을 쌓아왔다.
현재는 와인 전문 칼럼니스트이자 협회장으로서 생산자와 유통자, 그리고 소비자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며 대한민국 와인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