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가 그렇게 강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기계의 도전장을 받아들인 인간은 속절없이 당했다. 기술에 대한 놀라움은 어느덧 공포로 바뀌었다. 그러나 기계는 완벽하지 못했다. 연거푸 패한 인간 대표는 기계의 허점을 교묘히 파고들었고 결국 기계를 한 차례 쓰러뜨렸다. 인류는 너나없이 환호했다. 인류의 구세주라고. 한편의 SF(공상과학) 영화 같은 스토리가 대한민국에서 펼쳐지고 있다.
구글의 AI(인공지능) ‘알파고’와 천재기사 이세돌 9단의 바둑대결이 그것이다. 알파고에 3판 내리 불계패한 이 9단이 4번째 대국 만에 첫 승을 거뒀다. 이 9단의 성공적인 반격을 생중계로 지켜본 이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중국, 일본 등 해외언론들은 방송 도중 긴급 속보로 이 사실을 전했고 세계 프로바둑 랭킹 1위 커제 9단은 “자존심을 되찾아줬다”며 감격했다.
전 인류가 한마음으로 이세돌의 한판 승리를 갈망한 것 같다. 마치 SF 영화 ‘매트릭스’(1999년) 중 인류를 지배해온 프로그램과의 첫 전투에서 ‘네오’(키아누 리브스 분)가 승리했을 때처럼. 지난 3차례 대국에서 ‘알파고’가 보여준 바둑 기량은 완벽함 그 자체였다. 실수 없는 완벽한 플레이로, 또 프로기사들조차 해석할 수 없었던 ‘신수’로 이세돌을 3차례 내리 이겼다. 대회 시작 전 “감히 기계가 넘볼 수 없는 인간만의 게임 영역”이라고 자부하던 프로바둑계나 “다섯 대국 중 한 판이라도 지면 내가 진 것”이라고 장담한 이세돌은 금세 할 말을 잃었다.
충격에 빠진 건 이들만이 아니었다. 인간의 직관과 통찰력을 능가하는 AI의 출현에 환희보다 자괴감에 빠지는 이가 더 많았다. 누구라도 머지않아 기계에 자신의 일자리를 뺏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다. 일부는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이나 매트릭스의 ‘매트릭스’처럼 자가발전한 슈퍼 AI가 인류를 지배하는 SF 영화들을 떠올리며 두려워했다.
이세돌의 첫 승이 반가웠던 것도 이 같은 정서적 공감대 때문일 것이다. 제4국에서 이세돌의 승리는 여러 번 이어진 알파고의 패착(敗着)이 결정적이다. 알파고는 ‘버그’에 가까운 실수를 수 차례 범했다. “알파고가 바이러스에 걸린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나왔다.
단순 기계오류가 아니라 3차례 대국을 거치면서 알파고의 알고리즘을 간파한 이세돌의 지략 덕분이란 분석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세돌의 첫승에 기뻐한 진짜 이유는 아직 완벽한 AI가 없음을 눈으로 확인했고 그래서 안도했기 때문 아닐까. 인간만이 잘할 수 있는 영역은 분명 존재하고 기계가 이를 정복하는 데는 아직 더 많은 시일이 필요하다고.
지난 대국을 복기(復棋)해 보자. 당시 프로그램 오류든 의도된 실수든 알파고의 첫 패는 한편의 휴먼 감동 스토리를 빚어내며 남은 대국에 전 세계 인류의 관심을 또다시 쏠리게 했다. 하지만 이마저 기계설계자가 짜놓은 시나리오라면. 구글이 인정한 것처럼 이세돌과 맞서는 알파고는 프로토타입(시제품)에 불과하다. 이세돌의 강점까지 복제한 정식 알파고가 인류 앞에 다시 출현할 날이 멀지 않았다.
AI는 그렇게 충격적으로 우리 앞에 다가서고 있다. 알파고의 한 차례 오류만 보고 AI 시대를 먼 미래 일로 치부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막연한 공포감에 사로잡힐 일은 더욱 아니다. AI가 인류의 이기가 되느냐, 재앙이 되느냐는 결국 인간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사회·경제시스템, 윤리규범 전반에 걸쳐 AI 시대를 받아들일 준비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