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도시를 방문하면 백인과 흑인의 거주지가 눈에 띄게 구분되어 있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으리으리한 저택과 상점들이 있는 지역과 대조적으로 흑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에는 낡은 창고나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작은 집들이 모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미국의 인종차별이 여전함을 나타내는 증거로 보아야 할까. 1970년대 말 경제학자 토머스 셸링은 기발한 방법으로 이러한 거주지 분리현상을 연구했다. 2차원 평면 위의 한 지점에서 자신과 같은 색을 가진 가까운 이웃의 비율이 일정기준을 넘어서면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옆 칸으로 이사하는 사람들을 상상해보자. 모든 개인이 이러한 판단과 행동을 동시에 반복하면 전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색이 다른 이웃을 한 명도 용납하지 않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전부라면 시간이 갈수록 거주지가 극명히 나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개방적이고 다양성을 수용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이웃 10명 중 3명만 나와 같으면 나머지 7명이 달라도 괜찮은 인종차별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도 거주지 분리현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셸링의 연구는 그렇다고 답한다. 요컨대 구성원 서로가 차별하고 적대시하는 마음이 없는 경우에도 공동체는 나뉘고 분열될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나와 피부색이 같거나 나이대가 같고, 성별이 같고, 출신지역이나 학교가 같은 사람을 선호하는 것만으로도 ‘의도치 않은’ 차별이 일어나고 공동체가 쪼개질 수 있다는 말이다.
누구도 차별을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누군가는 차별당하는 역설. 우리가 주변에서 접하는 갖가지 갈등의 대부분은 사실 이러한 역설의 미묘한 변주곡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삼삼오오 모여 노는 과정에서 어떤 아이는 배제되고 상처받는다. 대학 이름에 더해 출신 고등학교 이름까지 보란듯이 점퍼에 새기는 대학생의 순수한(?) 자부심은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직장에서 누구와 점심을 먹을지 선택하는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는 의도치 않게 홀로 남게 되기도 하며, 더 편하고 재미있는 또래와 어울리다보니 나이 많은 세대와의 거리감이 심화되기도 하고 함께 일하기 편한 동성의 직원을 택하다 보니 다른 성별을 가진 지원자가 배제되기도 한다.
왕따 당한 학생의 자살, 성차별 및 혐오범죄에 대해 사람들은 명시적 차별의 의도가 없어 보이면 모두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답한다. 의도가 선했기에 결과가 나빠도 비난받을 사람은 없고 결국 상처와 무거운 짐은 오롯이 차별당한 사람의 몫으로 남는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때론 성별로, 나이로, 교육수준으로, 경제수준으로, 피부색깔로, 혹은 취향으로 선택하고 무리 지으며 누군가는 배제되는 일이 끝없이 일어난다. 비슷한 사람끼리 선호하고 모이는 것은 보편적이고 불가피한 일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의도가 순수하고 보편적이라고 해서 그러한 선택이 모여 만들어내는 미묘한 사회적 결과가 모두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악은 평범한 선택의 또 다른 얼굴에 불과하다는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지적처럼 이민자나 외국인, 이성과 함께 일하고 살아가는 것이 불편하다는 평범한 생각이 모여 사회를 비극적인 방향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차별과 배제, 폭력은 극단적 정치구호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 직장, 공동체에서 우리가 찾는 작은 편안함과 익숙함 속에 도사리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