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 여름 밤을 떠올려 본다. "엄마, 잠이 오지 않아요" 라고 말하면 매번 "자 눈감고 1부터 100까지 세어보자"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때 실수하지 않으려 바짝 긴장해 숫자를 세다보면 어느 새 거짓말처럼 꿈나라로 빠져들곤 했다. 매번 똑바로 100까지 세려 집중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대로 된 적은 거의 없다. 90, 91, 92…. 거의 다 왔다 싶었지만 거기까지 였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신기한 '수면유도기술'이 아닐 수 없다.
전국적인 무더위가 보름가량 이어지면서 많은 이들이 지쳐가고 있다. 한 의료 통계에 의하면, 열대야로 인한 수면부족 등으로 최근 한 달새 병원을 찾은 환자가 1000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쯤되면 '잠들지 못하는 자의 고통'이 결코 가벼이 들리지 않는다. 혹여 이들에게 어린시절 추억을 들려주며 '숫자세기'를 권한다면 무어라 말할까. 아마 세상에서 가장 고약판 표정을 지으며 '너나 하세요'라고 쏘아부칠 것 같다. 그만큼 이번 '찜통더위'는 참기 힘들고, 그 기세 또한 대단하다.
체내 온도가 한계점에 다다를 무렵, 가장 쉽게 찾게되는 여름가전이 바로 '에어컨'이다. 무더위에 맞서 집에서 피서를 대신하겠노라 호기를 부리는 이들도 어찌보면 다 이런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헌데 요즘에는 이 마저도 쉽지 않은 모습이다. 가마솥 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연일 전력사용량 최고치가 갱신되는 것도 걱정이지만, 사람들을 더 움추리게 만드는 건 낡은 전기요금 누진제가 가져온 '요금폭탄' 때문이다.
지난 1974년 도입된 누진세는 전기 사용량이 많아질수록 단위 요금이 최대 11배까지 비싼 요금을 내도록 하고 있다. 전체 6단계로 나뉘어지는 요금 체계에서는 월평균 사용량이 100kWh 이하이면 kWh당 60.7원이 적용되지만, 전체 사용량이 500kWh를 넘어서는 순간 kWh당 요금은 709.5원으로 바뀌게 된다. 여름에 집에서 에어컨을 장시간 틀다 다음 달 수 십만원의 요금폭탄을 얻어 맞는 것도 다 이같은 연유에서다.
문제는 이같은 누진제가 전기 사용량이 큰 산업용과 상업용에는 적용되지 않고 일반 가정용 전기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가전제품 수도 적고 전기 소요량이 많지 않았던 예전에는 "가정용 전기를 아끼자"는 취지가 나름 인정됐지만, 가정 전력 사용량이 크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누진제를 그대로 두고 이 부담을 모두 개인에게 떼 넘기는 건 정부의 책임회피이자, 직무유기다.
'전기를 많이 쓸수록 비싼 요금을 매겨야 한다'는 이른바 '징벌형 누진제'가 계속되면서 전기료 폭탄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작년의 경우, 에어컨 등 전기 사용량이 많은 7~9월, 누진제로 인해 매월 수 십만원의 전기세를 떠안은 가구 수가 전국 60만 호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을 정도다. 전기세 방식을 결정짓는 정부가 그동안 변해버린 개인의 주거형태, 생활패턴을 고려하지 않는 사이 낡은 누진제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개인들의 몫으로 남았다.
정부가 내놓은 대책에서도 이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는 엿보이지 않는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대표적 에너지 낭비 사례라 할 수 있는 '문 열고 냉방 영업행위'에 대한 상시 점검을 강화하고 적발된 위반 업소들에 대해서는 과태료를 부과해 이같은 행위를 바로 잡겠다"고 했다. 과도한 누진세를 개선하라는 국민 요구는 아예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지난 2014년 가정용 전기요금에 대한 누진제 적용이 잘못됐다며 한전을 상대로 한 소송 누적 인원이 3500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참다못한 국민들이 행동에 나선 것인데 이쯤되면 정부 당국자들도 책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전기세 걱정에 에어컨도 켜지 못하는 '비정상'은 반드시 정상화돼야 한다. 무더위에 잠들지 못하는 고통은 정말 심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