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박근혜 정부의 메모는 메모가 아니다

나윤정 기자
2016.12.06 05:58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 입니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유족이 경찰 측으로부터 받은 메모지 1장(왼쪽).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자택 앞에서 발견된 메모(가운데). 지난 1일 서울 여의도 켄싱턴호텔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가 회동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 전 대표의 손에 회동 중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메모지가 눈에 띈다. /사진=신현우 기자, 뉴시스 제공, 이동훈 기자

성완종의 목숨을 건 '메모', 김영한의 역사가 될 '메모', 안종범의 업무용 '메모', 김기춘의 전략적 '메모', 김무성의 보이기 위한 '메모'….

메모들이 이만큼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메모를 사랑한 박근혜 정권 탓에 회사에서도 내부비리 같은 상황이나 상사가 부당한 지시를 내리면 훗날을 대비해 조목조목 메모하자는 우스갯소리가 SNS에 떠돈다.

고참이 되면서 회의하는 일이 잦은데 후배들 대부분 수첩이나 뭔가 적을 것을 준비해온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며 열심히 메모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메모하는 사람들을 보면 '공감'이 느껴진다. '아~ 이 사람이 내가 하는 얘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왠지 이런 사람을 접하면 신뢰가 간다. 좋은 평가가 뒤따르는 건 인지상정이다.

메모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교육산업연구소 문상은 소장은 메모의 효용에 대해 "메모라는 외부의 '아이디어 공간'을 만들어 놓으면 인간의 사고방식이 외부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며 "그러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내부의 사고와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생각을 형성하고 조직화해준다"고 말했다.

자고로 위인들은 대부분 메모광이었다. 갑자기 떠오른 악상을 호텔 메모지에 적은 존 레넌은 이 메모를 불후의 명곡 '이매진'(Imagine)으로 탄생시켰고, 미국 헌법의 뼈대를 만든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린은 '다이어리의 아버지'로도 불릴 만큼 메모광이었다.

식당에 갔다가 떠오른 아이디어를 냅킨 위에 고추장을 찍어 메모했다는 만화가 허영만 화백의 일화도 그가 보통의 메모광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스타플레이어도 아닌 코치 출신 염경엽 감독이 하위권만 맴돌던 넥센을 3연속 포스트시즌에 올려놓으며 강팀으로 변모시킨 힘 역시 19년 동안 경기의 모든 상황을 메모하고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6권의 전술노트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어떻게 메모할 것인가. 사카토 겐지의 저서 '메모의 기술'을 참고하면 먼저 언제 어디서든 메모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수첩을 항상 소지해야 한다. 주위 사람들을 깊이 관찰하는 것도 필요하다. 중요 사항은 눈에 띄도록 다른 색으로 메모하는 등 특별한 표식을 해두는 것이 좋다. 또 쉽게 기록하고 알아볼 수 있게 기호와 암호를 적절히 활용하며 메모를 주제별로 분류, 보관하는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전 메모를 다시 읽어 그 당시와 다른 생각을 해보는 등 메모를 재활용해야 한다.

메모를 좋은 방향, 발전적 아이디어에 이용한다면 개인과 사회를 위해 큰일을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이런 메모가 '국정농단의 수단'으로 전락했다니 씁쓸하다. 메모는 창의적인 일을 위한 토대가 돼야지 받아쓰기 해서 나쁜 짓 하라는 게 아니다. '어떻게 메모할 것인가'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한다. 박근혜 정부의 메모는 메모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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