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걸의 구역질 [우보세]

박준식 기자
2021.12.28 03:30

[우리가 보는 세상]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이동걸 한국산업은행 회장이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의 예금보험공사, 한국산업은행, 중소기업은행, 서민금융진흥원에 대한 국점감사에서 답변하고 있다. /사진=홍봉진 기자 honggga@

서울대와 예일대에서 수학한 이동걸은 김대중정부가 1998년부터 청와대 참모로 쓰기 시작했다. 외환위기로 경제가 파탄난 때다.

그는 부실화한 기아자동차를 현대차그룹에 넘겨 살려냈고 대우그룹 해체문제를 처리했다. 이를 눈여겨본 노무현정부도 그를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에 앉혀 막후 거사를 지휘하게 했다.

탄탄한 이론에 구조조정 정책의 실무경험으로 엘리트 커리어를 쌓아온 것 같지만 막상 당시에는 행복하지 않았다 한다. 자칫 실수하면 수많은 실업자가 발생해 민생이 파괴되고 스스로도 언제 실책한 책임을 지고 감옥에 갈지 모른다는 염려가 컸다는 것이다. 야근을 마친 귀갓길에는 청사 뒤편에서 구역질이 심해 먹은 걸 이유 없이 게워낸 때가 부지기수였다. 얼마나 눌렸는지 가늠할 수 있는 일화다.

정치색과 무관한 학자였지만 이명박정부가 들어선 뒤 그는 금융연구원을 스스로 박차고 나왔다. 임기를 1년반이나 남겨두고 이동걸은 "연구원을 정부의 싱크탱크가 아니라 마우스탱크 정도로 본다"며 사퇴의사를 밝혔다. 외환위기 재발을 금산분리라는 견제장치로 막아놨는데 기업가 출신으로 집권한 대통령이 재벌 위주 정책으로 압박하자 연구원의 자율과 독립성을 강하게 주장하며 자리에 연연치 않은 것이다.

이동걸은 이후 8년여를 몇몇 대학에서 정교수도 아닌 초빙교수, 객원교수 등으로 떠돌았다. 스트레스가 컸던 탓인지 그 사이 투병생활도 했다. 카랑카랑하던 목소리가 낮고 묵직한 저음으로 바뀐 인고의 시간이었다.

2017년 집권한 문재인정부는 그해 9월 KDB산업은행 회장에 그를 삼고초려했다. 감당키 힘든 구조조정을 해본 그에게 현안 전권을 맡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전 정부가 실책한 한진해운 파산과 같은 비극을 만들지 않기 위한 조처였다. 몇몇 결단이 이뤄지면서 망할 뻔한 아시아나항공과 HMM(옛 현대상선)은 코로나19 시기에 최대 실적을 올리는 흑자기업이 됐다.

지난여름 청와대는 이동걸을 금융위원장으로 영전시켜 금융정책을 총괄하게 하려 했다. 하지만 산전수전에 지병을 치른 그는 장관 자리에 대한 욕심보다 숙명처럼 맡겨진 산업 구조조정을 마무리하는 데 집중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동걸이 최근 공정거래위원회를 향해 쏟아내는 고언(苦言)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한국 공정위가 한국 기업 살리기를 외면하는 건 지나친 복지부동이라는 비판이다.

정권 말이 다가오자 국내 일부도 유럽연합(EU)의 합병 불승인 가능성을 전제로 산업은행의 귀책사유를 묻는 비판을 한다. 주뼛거리는 공정위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 우리 조선사 합병으로 LNG(액화천연가스)선가 앙등을 우려하는 EU를 편드는 꼴이다. 게다가 대한항공-아시아나 합병은 세계 시장 점유율이 2% 미만에 불과한 데도 미국이 싫어한다는 핑계를 댄다.

이동걸 회장이 내린 판단이 모두 정답이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자리에 연연치 않는 정책결정자에게 내년 3월 이후 책임지고 나가라는 건 졸렬한 비난이다. 결과의 성패 여부를 떠나 한 번도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보지 못한 이들은 그럴 자격이 없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