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정책을 전면 재검토하겠다. 설계 수명이 다한 원전의 연장은 선령을 연장한 세월호와 같다"
2017년 6월19일, 문재인 대통령은 고리원전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문 대통령이 대선 후보시절부터 밝혀온 '탈원전' 구상이 현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기조가 된 순간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선 이후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인 세월호까지 언급했다. 취임 한달된 대통령의 추상같은 선언에 누가 감히 다른 말을 보탤까.
대통령은 모든 사안에 일일이 설명을 하거나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통령의 발언마다 "무슨 의미입니까"라고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원전 정책에 관여하는 관료들은 이날 문 대통령의 발언을 모니터 앞에 걸어두고 의미를 곱씹으며 정책을 짜야했다. 관련자 인사나 추가 발언이 없이 대통령이 '침묵'하는 한, 그 지시는 언제까지나 유효한 것으로 보는 게 공직사회의 업무방식이다. 그렇게 탈원전 정책은 속도를 냈다.
#"원전이 지속 운영되는 향후 60여 년 동안은 원전을 주력 기저전원으로서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점검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 특히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따른 공사지연으로 준공이 늦어지고 있는 신한울 1·2호기와 신고리 5·6호기의 정상가동에 속도를 내달라고도 했다. 이러한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임기 막바지 탈원전 정책을 번복한거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글로벌 원자재 가격 급등과 고유가, 이에 따른 물가 상승 압력, 한국전력공사의 6조원대 적자 등 탈원전 과속 부작용이 나타나는 가운데 퇴임을 앞둔 문 대통령이 임기말 스스로 면죄부를 부여했다는 해석이다.
이미 대선 후보들은 탈원전 정책의 수정을 공언한 상태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탈원전 정책 폐기를 내세웠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조차 '감(減)원전'으로의 속도 조절을 시사했다. 어느 후보가 대권을 잡든지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을 시간이 다가온다는 얘기다.
#"정부의 에너지전환 정책 기조는 변함없음."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 이튿날 산업부는 보도설명자료를 내고 대통령이 탈원전 정책을 뒤집었다는 지적를 부인했다. 문 대통령도 "에너지 정책 전환은 2084년까지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라고 단서를 달았다고 한다. 문 대통령의 문장만 보면 일관성은 유지된다지만 5년 간의 맥락에선 틀린 말이다.
지난 5년간 원전은 치열한 진영 싸움 양상을 보였다. '원전=잘못된 것'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졌고, 국·과장급 실무자까지 법정에 서는 초유의 일까지 벌어졌다. 전력 수요 증가와 그에 따른 사회비용부담 등 탈원전 과속을 우려하는 여론도 끊임없이 나왔다.
여태껏 침묵을 지켜온 문 대통령은 퇴임 직전에야 원전 활용을 주문했다. 그러면서도 탈원전 정책 번복에 대한 시인이나 사과는 없었다. 결국 '대통령의 침묵'을 '업무 속행'으로 받아들여 온 공직사회만 지난 5년간 대통령의 말을 과잉해석한 꼴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