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언론의 사회적 품위

양지훈 변호사(위벤처스 준법감시인)
2022.04.29 02:05
양지훈 변호사

중년의 이른 나이에 사망한 몰리 레인의 장례식장에는 그녀의 옛 연인이 차례로 등장한다. 성공한 작곡가인 클라이브와 유명신문 '더 저지'의 편집국장 버넌은 몰리의 애인인 동시에 오랜기간 우정을 나눈 친구다. 또다른 몰리의 연인 가머니는 현직 외무장관이자 차기 영국 총리에 오를 가능성이 높은 유력 정치인이다. 이들은 뜻하지 않게 마주친 장례식장에서 상대방을 의심하고 혐오하며 자신만이 몰리의 진정한 연인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몰락을 예정했다. 1998년 출간된 이언 매큐언의 소설 '암스테르담' 이야기다. 작가는 이 소설로 3대 문학상의 하나로 불리는 부커상을 수상했다.

몰리의 연인으로 호출된 이 인물들은 장례식을 계기로 자신들의 삶을 돌아볼 수밖에 없게 됐다. 제각기 일중독자이기도 한 이들은 중년의 삶을 조용히 살필 겨를도 없이 여전히 일에 파묻혀 살지만 '어쩐지 부질없이 열정을 흘려버리기만 한 속 빈 일중독자'란 점에서 닮았다. 결국 이 인물들은 옛 친구의 죽음 앞에서 각성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버린 채 지금껏 살아온 그대로의 관성에 따라 비극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그 비극의 시작은 사진작가인 몰리가 찍은 가머니의 옛 사진 3장에서 비롯됐다. 외무장관 가머니는 대중에게 공개되면 자신의 경력 모두를 날려버릴 만한 사진을 몰리에게 남겼는데 거기에는 야릇한 표정으로 여성복장을 한 외무장관의 '의상도착증' 장면이 적나라하게 담긴 것이다.

은밀히 이것을 입수한 버넌은 사진을 보도할지 말지를 두고 친구 클라이브와 대척하게 된다. 버넌 자신은 판매부수가 급격히 떨어지며 사세가 축소되는 위기에 맞서 이를 탈출하기 위한 좋은 기회로 삼아 보도키로 마음먹지만 클라이브는 공적 인물이라 할지라도 사생활은 보호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보도에 반대했다.

결국 '더 저지'는 이 사진을 기사에 게재하지만 가머니의 부인이 보도에 앞서 이를 먼저 공개함으로써 여론은 오히려 극적인 반전을 맞는다. 공인이라 할지라도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사적 취향은 개인의 영역으로 남겨야 한는 것이 우세한 여론이 됐고 편집국장 버넌은 탐욕과 위선이 점철된 구시대를 대변하는 비윤리적이고 치사한 인간으로 취급돼 결국 해고된다.(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사건에 휘말린 버넌과 클라이브는 각자의 탐욕과 오해로 서로를 파국으로 몰고간다.)

버너가 일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신문사 '더 저지'(The Judge)는 과연 무엇을 심판하려 한 것일까. 버너는 편집국장의 힘을 이용해 사형제를 찬성하고 외국인을 혐오하는 외무장관 가머니를 의도적으로 파멸시키려 했다. 진보정치를 지지하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가머니가 영국 총리가 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공공의 선이 될 수 있다고 버넌 스스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유력 신문사 편집국장은 저급한 대중의 호기심에 기대어 정치인을 제거하려 했다가 오히려 본인과 신문사를 위기에 빠트린다.

이 이야기를 표현의 자유의 한계, 공직자 명예보호에 관한 법리에 따라 판단해보면 공직자의 공무집행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개인 사생활에 관한 사실의 영역에선 표현의 자유가 제한돼야 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공직자의 자질, 도덕성, 청렴성에 관한 사실은 그 내용이 개인적인 사생활에 관한 것이라 할지라도 순수한 사생활의 영역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우리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존재하지만 적어도 가머니의 사진들은 공직자의 자질 등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새 정부 총리와 장관의 인사검증 기사들이 언론을 통해 한창 다뤄지는 요즈음 일부 보도는 대중의 호기심만을 충족한다는 점에서 가머니 사례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언론의 사회적 품위를 돌이켜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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