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이건희 회장과 개

임동욱 기자
2023.09.21 04:06

삼성의 안내견 사업이 30주년을 맞았다. 1993년 6월 '신경영'을 선언한 고(故) 이건희 회장은 같은 해 9월 '삼성화재 안내견학교'를 세웠다. 기업이 운영하는 세계 유일의 '개 학교'다.

신체적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을 배려하고 돕기 위해 시작한 이 사업은 우리 사회의 인식을 바꿔놨다. 시각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이 안내견의 도움을 받아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 구성원으로 돌아왔다. 기업의 '선한 영향력'이다.

이 회장은 개를 매우 좋아했다. 6.25 전쟁 직후 일본에서 혼자 초등학교를 다녔던 이 회장은 외로웠고, 그의 친구는 개였다. 귀국 후 중학교 생활 적응이 쉽지 않았을 때도 개가 그의 곁을 지켰다. 이 회장은 "사람과 동물 간에도 심적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고 회고했다. 삼성의 총수가 된 이후에도 그의 곁에는 늘 개가 있었다.

이 회장은 진정한 '개 박사'였다. 진돗개는 1960년대 천연기념물 53호로 지정됐는데, 세계견종협회는 '확실한 순종이 없다'는 이유 등으로 진돗개의 원산지가 한국임을 증명해 주지 않았다. 이에 이 회장은 직접 진도로 내려가 진돗개 30마리를 샀고, 전문가들과 함께 '순종 만들기'에 나섰다. 결국 이 회장은 1979년 세계견종협회에 '순종' 진돗개를 데려가 한국을 원산지로 등록하는데 성공했다.

이 회장은 개를 통해서도 경영을 구상했다. 이 회장은 동물과 자연을 주제로 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즐겨 봤는데, 토종개인 풍산개와 외국산인 셰퍼드가 싸우는 장면에 주목했다. 풍산개는 셰퍼드의 절반 밖에 안 되는 왜소한 몸집이지만, 꾸준히 상대의 허점을 공격해 지치게 한 후 결정타를 날려 싸움에서 이겼다. 이 회장은 '덩치가 크다고 해서 반드시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작은 조직일수록 환경 적응이 빠르고 기동력이 높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삼성의 체질변화를 이끌었다.

지금은 금지됐지만 과거 한때 성행했던 투견(鬪犬)에서도 혜안을 얻었다. 투견 챔피언을 만드려면 어린 개를 선별해 은퇴한 챔피언과 싸움을 시킨다. 은퇴한 챔피언이 노련함을 앞세워 어린 개를 압도할 때쯤 조련사가 이들을 떼어 놓는다. 그렇게 한 번도 패하지 않으면서 퇴역 챔피언이 갖고 있는 기술을 전수받은 개는 대회에 나가면 대부분 챔피언이 된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지면 그날로 은퇴한다. 한 번 싸움에 진 투견은 다시는 챔피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잘 나가던 일류 기업이 한 번 패배해서 이류 기업이 되고 나면 다시 올라서기는 어렵다"며 "그것은 패배 자체의 타격보다 패배의식이 마음 속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회장이 그토록 '1등 삼성'을 강조했던 이유다.

이 회장은 개를 기르면 사람의 정서가 풍부해지고 인성이 성숙해진다고 했다. 부모의 보호를 받기만 했던 아이들이 동물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남을 생각할 줄 알고 사랑도 베풀 줄 아는 인간미 넘치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지론이다.

이 회장은 3년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철학과 노력의 결실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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